‘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가. 무한히 펼쳐지는 자연과 세계 속에서,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아니, 오히려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이 질문은 인간 인식의 출발점이자, 지식과 진실을 향한 탐구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안다’는 개념을 쉽게 사용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들은 사실상 매우 제한된 경험과 지식, 이해의 조각들에 불과하다. 내가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범위는 곧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범위는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 선택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크기는 각자의 지식수준과 이해의 깊이에 따라 다르다. 지식이 얕고, 이해가 부족할수록 그 창은 작고 낮을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경험과 역사로 검증된 만고의 진리다. 지식과 이해의 범위는 무한하다.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존재다. 말과 글, 언어는 세상을 해석하는 우리 고유의 렌즈이자, 타인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유일한 도구다. 이 도구를 잘 다루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말하기’, ‘쓰기’, ‘읽기’라는 기본적 훈련을 반복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 글로는 닿지 않는 진실이 존재한다. 이러한 ‘말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몸으로 겪고 살아내는 과정을 우리는 ‘삶’이라 부른다. 즉, 말과 글은 나의 인식을 표현하는 개인적 도구일 뿐이며,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상대의 몫이다.
같은 풍경도 누구에게는 슬픔이고, 누구에게는 평온이다. 이를테면, "비구름이 걷히며 드러난 산 중턱의 짙은 초록빛 풍경"은 어떤 이에게는 폭우에 대한 불안의 연장이 되고, 다른 이에게는 비 개인 뒤의 낭만으로 다가온다. 현상은 하나지만, 진실은 무수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경험과 감정, 지식의 차이가 곧 ‘개인적 진실’을 만든다.
지식은 철저히 차별적이고 편파적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여기에는 회색지대가 없다. 더구나 우리는 종종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한다. ‘지식의 왜곡’이다. 이 왜곡은 불완전한 정보, 단편적 사실, 그리고 풍문을 통해 접한 진실들로 인해 심화된다. 정확히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그것을 말로, 글로,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개념이나 상황을 타인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른다’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지식에 구멍이 나는 이유는 바로 배경, 역사, 맥락, 그리고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상만 보지 말고, 그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봐야 한다.
예컨대,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장은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정보의 실체에 도달하기 어렵다. 존재의 형태에 따라, 특히 살아있는 세포 안에는 이온과 동위원소의 움직임이 있으며,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인문학적 사실의 질문도 마찬가지다. “영국 성공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헨리 8세의 결혼을 위한 종교개혁”이라 답하는 것은 지류만을 본 것이다. 성공회의 본질은 “영국 왕이 교황 역할을 겸하는 제도”다. 이 핵심을 이해하면 다른 세부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면 지식이 쌓이고, 지혜로 변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나이가 든다고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익숙한 사고 틀에 갇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더 많다. 무엇보다 문제는 망각의 속도가 새로운 학습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젊은 시절에 배운 지식에 머물게 되고 세상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를 공부시켜야 한다. ‘신독’의 자세, 즉 혼자 있을 때도 스스로를 경계하며 학습하는 태도는 나이 들어 현명해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조건이다. 아무리 시대가 빠르게 변해도, 지식이 희박해질수록 세상을 오해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결국 ‘안다’는 것은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으며,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그 경계를 넓혀가기 위한 여정, 그것이 바로 ‘배움’이고, 동시에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