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걸 배우지 못한 세대

by Lohengrin

지난 토요일, 고등학교 동창 야유회가 있어 강원도 원주 금대리에 있는 계곡 식당에 갔습니다. 고향이 원주이고 원주에 있는 진광고등학교를 83년 2월에 졸업했으니 벌써 햇수만으로도 42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마른장마의 끝자락에 엄청나게 내리는 폭우가 일주일 내내 지속되고 있어 "비가 오는데 어쩌지?"를 걱정하며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면서 분당에 사는 친구를 태워 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아예 온 식구가 서울로 올라온 탓에 원주에는 일가친척도 없는 낯선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 원주에 있었으니 동네 친구 및 국민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두 그곳에 있어 추억팔이의 대상지입니다. 지금은 원주가 천지개벽을 하여 고등학교 시절의 옛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어서 내비게이터 아니면 길도 못 찾아갈 정도입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두 차례씩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전해오면 웬만하면 친구들 얼굴 보러 내려갑니다. 그래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고맙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총 6개 반에 전체적으로 350명 정도의 동창들이 있는데 골프모임, 조기축구회, 산악회 모임 등 취미 분과로 잘 모이고 있어, 나름 잘 나가는 동창모임이 되고 있습니다. 서울에 떨어져 있는 동창들이야 가끔 내려가는 게스트 역할을 하고 있어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토요일 점심때 빗속을 뚫고 모인 동창들이 35명 정도입니다. 전체 동창중 10% 정도가 모인 것입니다. 적은 인원이라고 할 수 없는 숫자입니다. 40년이 넘은 모임을 해보면 눈치채게 됩니다. 이 숫자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입니다. 동창회 집행부 친구들이 일일이 전화하고 독려하고 해야 모일 수 있는 숫자입니다. 빈 몸으로 내려가 삼계탕에 삼겹살만 축낸 당사자로서는 고마울 따름입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좋은 이유는 대부분 다른 직종의 일을 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대학친구들은 보통 같은 업종에 근무하는 경우들이 많아 다양성을 간접체험하기가 힘들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학창 시절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끄집어내고 여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친구 놈을 소환하여 놀려먹기도 하는 재미가 계곡물소리만큼이나 시끄럽게 들립니다.

그런데 올해 야유회의 대화주제들이 살짝 예전과 다름을 눈치채게 됩니다. 직장을 다니던 친구들이 대부분 지난해 정년퇴직을 했기 때문입니다. 토요일 모인 동창 중에서 직장을 다니다 정년퇴직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의 패턴을 바꾼 친구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영업으로 독립하여 경제일선에서 뛰고 있는 친구들이고 아직도 현업에서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능력 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년퇴직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관심이 상당합니다.


"야! 백수로 뭐 하면서 노냐? 정년퇴직하고 1년 정도 됐는데 노는 게 지겨울 때가 됐을 텐데?"


'온전히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64년생들이 국민연금을 받는 시기는 3년 뒤인 2027년 생일달 다음부터인지라 아직 연금 공백기인 시기입니다. 그나마 개인연금이나 퇴직연금 준비를 잘해서 3년을 버틸 수 있는 사람 또는 정년퇴직하고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시기에 있는 사람, 그리고 공무원 연금, 군인연금을 받고 있는 친구들에 대한 질문입니다. 자영업을 하면서도 국민연금 가입을 하여 착실히 노후를 준비한 친구들도 있지만 의외로 국민연금 가입을 안 하고 개인사업을 운영하는 친구들도 상당히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공군 파일럿으로 정년 퇴역한 친구가 2년째 연금 받으며 놀고 있는데, 노는 게 스트레스라는 말을 꺼내자 모두들 시선이 그 친구에게 집중됩니다. "연금수령액이 웬만한 월급쟁이보다도 많을 텐데 웬 스트레스? 그냥 놀아도 되는데?"라는 눈초리들이 꽂히고 다들 귀를 쫑긋이 세우고 넋두리를 듣습니다.


"처음 한 3달은 노니까 좋아. 그런데 집에 와이프 하고 같이 하루 종일 같이 있으니 슬슬 짜증도 많아지고 그래서 눈치껏 밖에 나가서 놀려고 하는데 나가면 놀게 없어. 친구들도 다들 퇴직하고 시간 많아서 같이 골프 치러 갈 사람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부킹해 놓으면 4명 모객이 안돼. 혼자 노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이제 슬슬 우울증이 오려나 봐"

우리 세대가 노는 걸 배우지 못해 모르는 세대 중 하나일 겁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직장이 삶의 모든 것이 되는 세대였기에 그렇습니다. 1년에 주어지는 연차 휴가를 제대로 다 써본 사람,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최고로 더운 여름 한철이라고 해봐야 가족들이랑 길어야 주말 끼고 4박 5일 정도 다녀오는 게 다 인 세대입니다. 일주일을 통으로 휴가를 내본 시기가 아마 정년퇴직 전 10년 세월도 안될 겁니다. 그렇게 4박 5일 여름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것이 직원으로서 당연한 임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세대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으니 '온전히 주어진 자기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갈팡질팡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데 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놀아본 놈이 잘 놀게 됩니다. 노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특히 혼자 노는 법을 잘 익혀야 합니다.


잘 노는 핵심은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운동이나 산책도 그냥 걷고 뛰는게 아니고 체중 70kg의 목표를 세우고 매일 체중계에 올라서서 확인을 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기타 같은 악기를 배우든 주말 텃밭을 장만하고 감자 심고 상추 키우는 공부를 하던 목표의 루틴을 확보해야 합니다. 시간표 짜고 거기에 맞게 계획표를 구체적으로 적어놓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겁니다. 대충 일어나 대충 움직이고 대충 오늘은 뭐해볼까 정도로 시간을 접근해서는 말 그대로 3개월 만에 멘붕이 찾아옵니다.


퇴직하고 처음에는 이것저것 마구 해봅니다. 평생 못해본 것들을 새로 해보는 재미가 있는 것처럼 혹하고 들이댑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처음 잠깐 뿐입니다. 금방 적응하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봐로 끝납니다. 바로 거친 야만족들이 질풍노도로 밀려들면 전쟁이 금방 끝날 것 같지만 장기전에 접어들면 판판히 깨지는 이유가 훈련된 루틴을 갖고 있는 정규군이 월등히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노는 것도 계획하여 루틴과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자기 것이 됩니다.


노는 법을 배워야 하는 불행한 세대이긴 하지만 새롭게 노는 과정을 배우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면 이 또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노는 걸 배울 수 있는 시간과 자유가 있다는 건 어쩌면 축복일지 모릅니다. 놀 수 있는 자의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이 들면 현명해질 거라는 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