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지 그랬어!"

by Lohengrin

며칠 전 지인들과의 저녁 식사 모임이 있어 만나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갔다. 다들 영화관에 간 것이 언제인지 기억에 없다고들 했다. 그렇다고 영화를 안 보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OTT와 넷플릭스를 통해 더 많이 본다고 했다. 영화관을 찾아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인간 상상력 극단의 결과물이 영화일진대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본질은 안 바뀌었고 본질에 접근하는 수단만 바뀐 것이다. 수단이 진부하다고 느껴지면 당연히 멀어지게 되어있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스피어(Sphere)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스피어는 영화 전용관이 아닌 차세대 복합문화 공연장이다. 구형으로 만든 초현실적인 돔에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360도 파노라마 LED 스크린과 정밀한 사운드 시스템 등으로 관객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여 현실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독창적인 설계와 콘텐츠로 라스베이거스의 명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감히 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스피어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스피어 입장료 자체가 비교 불가다. 스피어는 좌석의 위치와 공연, 상영물에 따라 입장료가 다르다. 대략 49달러에서 199달러 정도를 한다. 비싸도 찾게 만드는 것이 전략이다.


영화 이야기하려다 엉뚱한 곳으로 주제가 샜다. 추석 명절 대목 영화로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를 봤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영화부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미안하지만, 박찬욱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 제작스타일은 내 취향에 안 맞는다. '올드보이'가 그렇고 '친절한 금자 씨'도 그렇고 이번에 본 '어쩔 수가 없다'도 그렇다. 인간 본성의 뒷면을 드러내고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박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계속 머릿속이 찝찝하다. 영화를 보는 순간은 웃고 즐겁고 권선징악도 있고 가끔 감동의 눈물도 있고 해야, 나에게는 영화를 보는 이유가 되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작품성을 운운하는 것은 아니다. 내 취향에는 안 맞는다는 소리다.


이번에 본 '어쩔 수가 없다' 영화 대사 속에 유일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있다. '미리' 역할을 한 손예진의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지 그랬어!"라는 대사다. 실업자 '만수'역할의 이병헌이 재취업 경쟁자라는 사람들을 처리하고 난 다음에 나오는 대사다. 나에게는 이 대사 한마디가 영화 전체를 흐르는 거대한 강물 소리로 들렸다.


'과연 어쩔 수가 없었을까?'를 계속 되뇌는 동안, '열심히 살지 말지 그랬어'는 어쩔 수 없는 변명에 대한 해답이었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는,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행간의 장치였으리라.


어쩔 수 없음은 극단의 선택이다. 선택에 대한 변명이자 해명이자 최면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선택에 대한 책임회피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처럼 현 상황을 버텨내고자 하는 생각 없음의 끝판왕이다.

영화 포스터 캡처

생각해 보면, 우리 존재 자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결과다. 태어나는 것도, 이 행성에 던져진 것도 나의 의지로 선택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 속 배우일 뿐이다. 생명이라는 옷을 입고 등장해, 순간순간의 장면을 이어가며 관계를 맺는다. 이 연결의 흐름을 불가에서는 ‘시절인연’이라 부른다.


연결이 끊기면 모든 것은 흩어진다. 그 연결의 고리가 시간이다. 실체는 없지만, 믿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인간은 그 믿음 위에 문명과 신념, 진실을 쌓아왔다. 그러나 진실조차 결국 ‘사기의 다른 얼굴’ 일 수 있다. 돌에 새기면 영원할 줄 알고, 종이에 기록하면 오래갈 줄 아는 것도 인간의 시선에 불과하다.


지구 표층에서 벌어지는 생로병사는 우주적 관점에서는 미세한 현상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태양과 행성들, 그리고 수천억 개의 별이 흩어져 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는 그저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벌어지는 찰나의 일이다. 칼 세이건이 보이저호의 카메라를 뒤로 돌려 지구를 찍었을 때, 인간 존재의 미미함이 드러났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진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찌할 수 없음’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다. 도전하고, 바꾸고, 적응하는 창의적 존재다. 상황을 통제하려 애쓰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려는 끈질김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것이 상상력이고, 문명이며, 진보다.


태양계의 중력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조건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낸다. 추위를 막기 위해 외투를 입고, 계절의 변화에 맞춰 생존을 도모한다. 지구의 23.5도 기울어진 자전축이 만든 계절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는 에어컨을 만들고 난방 보일러를 만들고, 도시를 세운다. 그것이 인간이다.


결국 질문은 남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은 지구표층 위에서 잠시 유지되는 한순간의 형상일 뿐이고, 죽음은 다시 원자의 세계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이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허무보다 감사의 감정이 앞선다. 살아 있음에, 그리고 살아 있게 해 준 모든 현상들에 고개 숙이게 된다.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살게 해 줘서 고맙다.” 그것이 내가 이 어쩔 수 없는 세상에서 찾은 유일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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