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해를 못 하네, 그게 아니라니까"

by Lohengrin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으로 지구를 지배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특질은 바로 언어다. 언어는 단순히 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개별적인 사물과 대상을 명사화하고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영역, 즉 추상적인 개념과 관념까지도 단어로 규정하고 정의 내리는 놀라운 힘을 가진다. 대상을 정의한다는 것은 곧, 존재하지 않던 것을 사고의 영역 속에서 '존재'하게 만드는 위대한 창조 행위다. 언어 덕분에 인류는 폭발적으로 사회화되었고, 그 사회적 힘으로 지구촌 생태계의 지배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탁월한 소통의 도구인 언어가 실제로 대화의 장에서 오고 가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역설적인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화자와 청자가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은 같지만, 그 속의 '의미'와 '내용'은 서로 다르게 형성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부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아채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우리가 대화 속에서 '그럴 것이다'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아이러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소리의 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발화하는 순간의 기분, 환경, 관계 그리고 그 사람의 평생 습관과 정서가 집합된 응축체다. 같은 언어,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말의 톤과 장단고저, 그리고 담긴 감정에 따라 청자는 전혀 다른 뜻과 뉘앙스로 이를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마치 같은 재료로 만들었지만 요리사의 손맛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지는 음식과 같다.


언어의 본질적인 한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개개인의 고유한 심성과 정서가 반영된 조건 위에서 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완벽한 의미의 일치는 본능적으로 불가능하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 자식 간에도 "대화가 안 통한다"라고 호소하는 것은, 단순히 단어의 개념 차이가 아니라 말을 둘러싼 이 복합적인 '맥락'의 차이 때문이다.

이러한 '말'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명확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글'이라는 언어다. 글은 허공에 흩어지는 말과 달리, 기록되어 불변성을 가지며, 서로 다른 이해와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합의된 정의를 남긴다. 법률이나 계약서처럼, 글은 공간의 제약 속에서 시각을 동원하게 하여 독자의 집중을 유도하고 해석의 여지를 최소화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글마저도 완벽한 소통을 보장하지 못한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거나, 같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현상은 글에도 여전히 뉘앙스와 절묘판 표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명확할 것 같은 문장 속에서도 필자는 본질을 드러내거나 감추는 장치를 마련할 수 있으며, 독자는 각자의 지식 배경과 감성을 동원해 글을 재해석한다. 시각을 통해 즉각적으로 정보를 얻는 글은 언뜻 명확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명확성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놓치기 쉽다.


반면, 청각을 이용하는 말은 라디오를 들을 때처럼 시각이 배제되어 청자가 스스로 온갖 상상을 동원하고 감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글이 공간의 제약을 받아 집중을 유도한다면, 말은 공간의 폭이 넓어 청취자의 다른 감각과 정서를 함께 작동하게 한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인문학 포럼에서 느낀 실망감은 언어의 명확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파인만은 칼텍의 포럼에서 인문학 철학자들이 자신들만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며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대화가 보편적인 언어로 명확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에 크게 실망했다. 숫자와 방정식으로 자연을 설명하는 물리학자에게 있어, 명확성과 보편적 이해는 지식의 생명이다. 그는 진정한 지식이라면 누구에게나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파인만이 보기에 인문학자들이 사용하는 난해하고 복잡한 용어들은 깊은 이해의 부족이나 지적인 허세를 가리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일화는 소통의 도구인 언어가 때로는 지식을 독점하고 소통을 방해하는 장벽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이해와 오해의 모든 시작은 '말'에서 비롯되며, 이는 인간 언어의 숙명적인 한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우리가 현재까지 개발한 가장 효율적이고 탁월한 소통의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아직 이 언어를 뛰어넘는 의사 전달 방법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하고 글을 잘 써야 한다. 이는 단순히 유려한 문장이나 유창한 발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누가 일거나 듣더라도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달하는 능력이다. 대화의 기본인 단어의 개념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에 더해 자신의 심성이 반영된 이해와 오해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간 본성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본질을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의 말과 글에 담긴 기분, 환경, 그리고 숨겨진 의도와 심성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때서야 복잡하고 오해로 가득 찬 세상의 모든 현상과 소통의 역설이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처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바로 진정한 소통의 시작인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의도된 축적, 삶을 '내 것'으로 만드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