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창의성(Creativity)’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거대한 오해의 벽을 먼저 쌓아 올리곤 한다. 사전적 정의인 ‘새롭고 남다른 것을 생각해 내는 성질’이라는 말에 압도되어, 창의성을 마치 천지창조와 같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내는 신비로운 능력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성은 선택받은 소수의 천재들이나 발휘할 수 있는 전유물이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창의성이란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영감의 산물일까? 뇌과학과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창의성의 실체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창의성은 ‘평범한 사고가 도달한 비범한 결과’에 가깝다. 뇌 속에 저장된 수많은 기억, 오감을 통해 받아들인 경험, 희로애락의 감정, 그리고 학습과 교육을 통해 켜켜이 쌓아온 지식들이 서로 충돌하고 융합하며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순간, 바로 그 지점에서 창의성은 발화한다. 즉, 창의성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인식들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의미의 재구성’ 과정이다.
이 과정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상전이(Phase Transition)’와 꼭 닮아 있다. 자연계에는 물질의 상태가 급격하게 변하는 임계점이 존재한다. 바로 온도가 0도와 100도가 되는 순간이다. 0도는 물이 얼음이라는 고체로, 혹은 얼음이 물이라는 액체로 그 성질을 완전히 바꾸는 찰나이다. 100도 역시 마찬가지다. 액체인 물이 기체인 수증기로 비상하거나, 수증기가 다시 물로 환원되는 격변의 순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극적인 변화가 단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지루하고 긴 ‘축적(築積)’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영하의 얼음이 물이 되기 위해서는 0도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열을 가해야 한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기 위해서도 99도까지 온도를 높이는 끈질긴 에너지의 투입이 필요하다. 99도까지는 물의 상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임계점을 넘어서는 단 1도의 차이가 물질의 본질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창의성도 이와 같다. 평범함이 독창성으로, 일상의 생각이 비범한 아이디어로 변환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축적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경험과 지식, 고민과 사색의 온도가 임계점에 다다르지 못하면, 뇌 안에서는 어떠한 화학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천재들의 번뜩이는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쌓아 올린 시간과 노력이 끓는점을 넘어 폭발하는 상전이의 순간을 목격한 것에 불과하다. 변화의 순간은 찰나이지만, 그 찰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은 결코 짧지 않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이 창의성의 자리에 인공지능(AI)이 들어서고 있다. 인간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결과물을 쏟아내는 AI의 능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AI가 그려낸 그림, AI가 써 내려간 시나리오를 보며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과거의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확률적으로 가장 적절한 답을 내놓는 AI의 결과물을 창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AI는 분명 창의적이다. 인간이 평생을 걸쳐도 다 못 볼 데이터를 순식간에 조합하여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지점은 바로 ‘맥락’과 ‘실존’의 부재다. 인간의 창의성은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삶의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즉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신체성을 바탕으로 발현된다. 반면, AI의 창의성은 데이터 값의 확률적 조합을 극대화한 결과물이다.
인간이 삶의 비릿한 냄새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린다면, AI는 0과 1의 세계에서 최적의 해를 인출한다. 하지만 AI가 인간의 사고 패턴과 행동 양식을 완벽하게 학습하고, 맥락마저 흉내 내어 인간이 감동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는다면, 그때도 우리는 "AI는 영혼이 없다"는 말로 그 창의성을 폄하할 수 있을까? 인간만이 창의성을 독점하던 시대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생성형 AI라는 새로운 존재는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나, 인간성을 파괴하는 기술로만 바라보는 것은 100도씨를 향해 가는 시대의 온도를 읽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창의적인가’를 두고 AI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AI는 도구의 차원을 넘어 지적 동반자의 위치로 격상되고 있다. 진정한 창의성은 이제 AI가 내놓은 결과물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의미의 재구성’을 해내는 능력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변화하는 물성을 이해하고 증기기관을 만들어 냈듯, 데이터의 파도를 타고 AI라는 거인을 부리는 것. 기술에 휘둘리거나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으로 그 방향을 제시하고 선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창의성이다. 축적된 지혜를 바탕으로 AI와 공존하며 새로운 끓는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맞이할 미래의 상전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