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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05. 2020

무소유? 개나 줘버려라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비가 내립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갑니다. 갑자기 차를 어디에 주차해놨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지하 1층인가? 지하 2층인가? 심지어 무얼 찾고 있는지 조차 헷갈립니다. 수없이 많은 차 중에서 '내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화들짝 사물과의 인연이란 것도 '나'와 '내 것' 소유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운전을 하고 했었는데 오늘 앉은 운전석이 각별히 다가옵니다. '내 것'이기에 가능한 것. 소유란 이렇게 엄청난 존재이자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기본 개념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 것이 뭐지?"

차와 같은 사물과 물질을 떠나 내면의 질문으로 까지 외연을 들여다봅니다.

물음을 시작할 때는 항상 용어에 대한 개념 정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 것'이라 하면 소유의 개념이 강합니다. 자기 소유의 그 무엇, 물질적인 것이 되었던 지식이 되었던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것'에 대한 소유를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확대하여 그 안에서 "지식의 내 것"으로 다시 범위를 한정해 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는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욱 범위를 좁혀 지식에 한정해 봅니다. 지식이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이며 어떻게 쌓여 '내 것'이 되는지 말입니다.

지식은 시간에 비례해서 늘어납니다. 물론 이 시간에는 지식을 넓히고 쌓기 위한 노력이 함께 함을 뜻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지식이라는 분류로 나누어 그 분류들은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되묻게 됩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한 지식 쌓기에 지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알량한 '앎'의 선행을 접해 우월해 보려고 하는 자존심은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우월(Superiority)과 불안(Insecurity), 충동조절(Impulse Control)을 통해 지식 쌓기를 '잘난 체'하고 '아는 체'하는 도구로 이용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한걸음 떨어져 조견 해보고 '내 것'을 쌓는 일에 오만과 허세가 작동하지 않도록 내실을 기할 필요가 있음을 반성해 봅니다. 잘난 체 하고 아는 체 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말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인용하여 내 것인 양 거들먹거리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덜어내고 '내 것'을 만들고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부족하다면 더 채우고 보충해야겠습니다. 잘난 체 하지 않아도, 아는 체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지식이 향기를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시간에 대한 세심한 관찰입니다. 이 관찰은 바로 이 시간, 바로 이 현실 존재 자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창밖에 쏟아지는 장대비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들리는 저 소리를 '빗소리'로 인지하는 것은 그 언젠가 들었던 그 소리가 빗소리였음을 범주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귓전에 들리는 빗소리가 지난해 내리던 그 비의 양과 강도와 똑같은 소리는 아닐지언정 그 소리의 기억은 오늘의 빗소리와 동일시합니다. 경험의 기억이 되살아나 현재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까맣게 잊힌 줄 알았던 과거의 시간들이 불현듯 잔불처럼 번져 일어납니다.


기억의 메커니즘을 수년째 공부하면서 대강의 흐름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이렇게 불씨를 살리듯 피어오르는 기억의 환영은 어디에 숨어있던 것일까요? 두개골로 싸여 더 이상 기억의 용량을 늘리지 못할 것 같았음에도 방아쇠 당기듯 실마리만 던지면 물고기 낚싯바늘 물듯 덥석 기억을 끌어당깁니다.

'내 것'의 지식 쌓기는 그렇게 일상에 대한 관찰과 관심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隨處作主(수처작주 : 어디에 있더라도 주인이 되어 살다)라는 임제 선사의 법어가 '내 것'을 챙기기에 가장 적당한 문구 같습니다. 깨어있는 주인만큼 명확한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은 바로 내가 깨어 있는 주인일 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愼獨(신독 ;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감)의 자세로 여유 있을 시간을 '내 것'으로 챙겨보아야겠습니다. 게을러지지 않도록 경계해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겠습니다. 무소유가 최상의 선이겠지만 지금은 버릴 것을 만드는 시간으로 삼겠습니다. 있어야 버릴 테니 말입니다. 형이상학적 무소유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임을 알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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