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전과 후, 바뀌고 달라진 것들

by Lohengrin

어제저녁 퇴직하기 전 다니던 회사의 후배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 서소문으로 나갔습니다. 같은 부서에 같이 근무하다 지금은 다른 부서로 옮겨 일하고 있는 후배와 업무로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타 부서 소속 후배와의 약속입니다. 5시 40분 약속이었지만 집에서 4시에 출발해 퇴근시간에 맞추기로 했습니다. 집을 나설 때는 맑았던 하늘이 서소문에 도착하고 나니 먹구름에 덮이고 빗줄기로 변했습니다. 다행히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미리 들었던 터라 메신저백에 우산을 넣어가서, 내리는 비가 포근한 봄비로 느껴졌습니다.


약속장소는 일단 회사 건물 로비에서 보기로 한 관계로, 35년을 들락거린 그 장소로 갑니다. 가면서 은근히 설레기도 합니다. 정년퇴직을 한지 꼭 1년 5개월째인데 말입니다.


시청역 10번 출구를 올라섭니다. 다니던 회사 건물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런데 건물 앞을 가림막으로 막아놨더군요. 건물 리모델링을 한다고 합니다. 건물이 오래되긴 했습니다. 1976년 기공식명패가 붙어있는 건물이니 만 50년이 되었네요. 제가 다닐 때만 해도 건물 내부는 부분 부분 리노베이션을 했습니다만 건물 전체를 외벽을 비롯해 리모델링을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사실 이 건물은 평창동계올림픽을 하던 2018년에 리모델링을 하려고 발주까지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올림픽조직위원회가 그 건물에 입주해 있어서 외국 손님들이 엄청 찾아왔는데 건물이 오래되어 속칭 폼이 안나는터라 겸사겸사 리노베이션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아시는 바와 같이 당시에 여러 사건들이 꼬여 건물 리노베이션이 잠정 중단된 상태로 10여 년이 흘러 지금까지 왔다가 다시 재개된 모양입니다.


오랜 세월 한 회사를 다니다 보니, 건물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건물 외벽에 흐르는 역사까지도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속칭 꼰대의 오지랖이자 상념입니다.

사실 정년퇴직하고 서소문에 한 달에 한두 차례 정도는 왔었고 오며 가며 건물을 쳐다보긴 했습니다. 그렇다고 올 때마다 회사에 들어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괜히 약속도 없이 불쑥 들어갔다가는 열심히 일하는 후배들에게 방해가 되고 불편해할까 봐 차마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정년퇴직한 이후에 딱 두 번 정도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어제는 약속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근무하던 부서에 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빈손으로 들어가기가 뭐 해 코코호도 58개짜리 한 박스를 사서 들고 갑니다. 4시 40분 정도니 출출하기도 할 듯해서입니다. 그렇게 제가 근무하던 사무실이 있는 8층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전에 같이 근무하던 직원들의 전화번호를 검색해 봅니다. ID카드를 찍고 출입문을 열어야 하는 관계로, 문이라도 열어달라고 할 참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오는데 마침 홍보실장을 하는 후배가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문 앞에서 만났습니다.


가볍게 근황을 묻고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직원들이 한 명도 없습니다. 사무실이 썰렁합니다. 5시도 안 됐는데 "다들 회의 중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다들 퇴근했답니다. 제가 다닐 때도 근무시간을 정할 수 있는 선택근무제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대부분 근무시간을 분산해서 정했기에 이렇게 5시 전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 풍경은 생경하기까지 했습니다.


40명이 넘게 근무하는 사무실에 달랑 임원 2명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요즘 대기업 사무실 분위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요즘은 퇴근시간 땡 하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답니다. 제가 다닐 때만 해도, 퇴근시간되면 그래도 미적미적하다가 30분 정도 지나서야 슬슬 선배들 눈치 보며 일어나는 것이 미덕 아닌 미덕이었는데 말입니다.

손에 든 코코호도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꼰대 임원 2명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식사약속을 한 후배들을 만나러 로비로 내려옵니다. 5시 반 퇴근을 하는 직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옵니다. 그중에 제법 얼굴이 익은 후배들이 여럿 보입니다. 나오면서 계속 인사들을 합니다. 가끔은 이렇게 와서 후배들을 보는 재미도 있을 듯합니다.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그나마 낯이 익은 후배들도 근무 부서가 바뀌거나 정년퇴직 대열에 합류하고 나면 1-2년만 지나도 썰렁할 테지요.


식사약속을 한 후배들이 퇴근길에 합류합니다. 근처 중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정년퇴직자의 꼰대 이야기를 풀어 곧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고 경고를 해줍니다. 같이 자리한 후배 중에는 5개월 후면 정년퇴직을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들 퇴직을 앞두고 이것저것 걱정도 되고 준비를 한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먼저 걸어간 선배들이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고 해서 썰을 풀어주는 자리이기에 카운슬러 겸 컨설팅 겸 이것저것 선험자의 사례들을 장황하게 풀었습니다.


정년퇴직이라는 것이 막상 닥치면 다 해낼 일입니다. 아직 자기 일로 다가오지 않았기에 불안할 뿐이고, 다가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준비된 자만이 정년퇴직 후의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실 준비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경계를 잘 버티고, 가야 할 길을 찾아 무소의 뿔처럼 갈 수 있는 힘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이 50대와 은퇴한 60-70대가 가장 부유한 시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렵게 세상풍파를 헤쳐온 부모님 세대의 힘듦을 지켜봐 왔고 건강이 무너진 그들의 노후를 봐왔기에, 내 세대에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들을 하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운동하고 여행 다니고 공부하는 시니어와 그레이 칼러들이 넘쳐납니다. 세상을 사는 눈이 바뀌고 변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 수준의 경계를 걷고 있습니까? 노후를 화양연화의 시간으로 채우기 위한 준비는 잘 되어 있으시거나 준비를 하고 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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