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사피엔스의 역사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허무와 싸워온 투쟁의 기록이다. 인류는 죽음이 주는 본능적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관념적 방패를 주조해 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여정은 아주 오래전 단세포 생물들의 선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태초의 단세포 생물들이 각자의 개별적 영생을 포기하고 공생을 선택하며 다세포 생물로 진화한 것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집단적 계약'이었다. 린 마굴리스가 제안한 세포 내 공생설이 시사하듯, 서로 다른 생명체가 결합하여 하나의 정교한 체계를 이룬 것은 고립된 죽음보다 연대된 생존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연대는 필연적으로 개별 세포의 예정된 죽음이라는 대가를 수반했다.
우리는 이 '공생의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역설적으로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혼자 있으면 외로운' 실존적 모순에 직면한다.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갈등과 피로감을 상쇄하기 위해, 인류의 뇌는 공생을 유지하기 위한 보상 기제로서 '행복'이라는 화학적 환각제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현재의 모습으로 지탱해 온 신경생물학적 근원이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고도의 지능을 갖추고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면서부터, 이 질문은 단순한 생존 본능을 넘어 실체적이고 현상적인 철학의 문제가 되었다. 다세포 생물로서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노화와 죽음이라는 '천형(天刑)'을 가리고 위장하기 위해, 인류는 행복과 사랑이라는 중독성 강한 신경 전달 물질을 방책으로 삼았다.
하지만 대자연이 설계한 이 화학적 환각제에는 엄격한 유효기간이 설정되어 있다. 낭만적 사랑의 감정을 유발하는 페닐에틸아민이나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의 유효시간이 길어야 2~3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현대 뇌과학이 증명한 바 있다.
행복의 유효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쾌락 적응 과정을 통해 아무리 큰 만족감이라도 하루이틀이면 급격히 소멸하는 경험을 반복한다. 사랑과 행복이 영원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도파민과 같은 신경 호르몬의 일시적인 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도파민이 뇌를 지속적으로 지배하게 되면 생체는 평온이 아닌 파괴적인 중독 현상으로 치닫기에, 우리 몸은 끊임없이 호르몬의 양을 조절하며 저울질한다.
역설적이게도 사랑과 행복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더욱 갈구하게 만든다. 만약 행복이 영원한 상수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추구해야 할 가치도, 생존의 동력도 되지 못할 것이다. 결핍과 소멸의 가능성이야말로 행복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어둠의 배경이다.
또한 죽음과 사랑과 행복은 철저히 개별적이면서도 시계열적인 속성을 지닌다. 우리는 '지금 나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가 될 수 있다'는 시간적 전제 아래 삶을 영위한다. 현재 숨 쉬고 있는 육체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죽음의 전제가 있기에, 역설적으로 지금의 고난을 이겨내면 곧 사랑과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성취와 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바로 이 유한함과 무한함 사이의 간극에서 발원한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과 행복을 탐닉하고, 죽음을 회피하거나 늦추기 위해 건강을 갈구하는 존재다. 삶의 궤적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면 의외로 단순한 흐름이 읽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볼수록 존재의 층위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의할 것인지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세상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따르는 듯 보이다가도, 때로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놓이기도 한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오묘하고 숭고한 질문의 연속이다. 삶의 마지막 날에 내 생각과 의지로 '그래도 잘 살아왔다'라고 위안을 하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인지, 그 마지막 날,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풍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을는지 ---
하지만 인생 별 거 없다. 그렇게 되도록 남은 삶을 적극적으로 살면 된다. 어제 떠난 이가 그토록 살아보고 싶어 한, 오늘을 살고 있는데 무얼 못하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