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소재 선택의 고민

by Lohengrin

어제 하루 종일 한 단어가 그림자처럼 머릿속을 차지하고 떠나지 않았다. 매일 글의 소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일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숙명 같은 것이지만, 어제는 유독 그 무게가 달랐다. 하루 내내 나를 놓아주지 않은 단어는 '공간'이었다.


왜 '공간'이라는 단어였을까. 아마도 AI 강의를 하러 가는 전철 안에서 우연히 들은 유튜브 영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남대 철학과 박구용 교수가 TBS 라디오에 출연해 "공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통해 우리가 왜 특정 장소에 열광하고, 어떻게 삶의 영역을 확장해야 하는지"를 피력한 약 1시간 분량의 대담이었다.

사실 우리 귀에 들리는 수많은 소리가 진정한 정보로 치환되기 위해서는, 그 소리를 낚아챌 수 있는 내면의 그물이 필요하다. 한 시간 분량의 방대한 지식을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전부 빨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의 정보는 한 귀로 들어왔다 다른 귀로 흘러나가는 덧없는 파동에 불과하다. 무한한 외부의 정보 바닷속에서 특정한 의미를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내 기억 속에 그것을 잡아챌 날카로운 낚싯바늘, 즉 ‘후커(Hooker)’가 존재해야 한다. 기억의 후커가 부재한다면,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인지적 맹목’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외부 정보를 잡아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미 내 안에 쌓인 것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면의 지식 창고가 풍성해야만 새롭게 유입된 정보들이 기존의 데이터와 충돌하고 결합하며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이 통합의 과정이 비로소 나만의 관점을 형성하는 창의성으로 이어지며, 그제야 외부의 정보는 완전한 ‘내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제 나의 갈고리는 무엇이었을까. 15년 가까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던 자연과학 공부가 심어놓은 '시공간(spacetime)'이라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137억 년 우주의 진화를 공부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을 서너 차례 손으로 따라 써본 적이 있다. 미적분 방정식을 풀 줄 모르는, 뼛속까지 인문학으로 채워진 사람이지만 그냥 따라 쓰면서 감으로 느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질량을 가진 존재가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를 왜곡시키고, 그 휘어진 곡률 자체가 곧 중력으로 나타난다는 현대 물리학의 경이로운 통찰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공간'이라는 단어가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 경계에서 오는 내면의 갈등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학이 말하는 의미의 공간과 자연과학이 말하는 물리적 시공간 사이의 어딘가. 그 사이 어디쯤을 아침 글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종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철학과 자연과학이 다루는 공간의 범위와 차원은 내 얄팍한 기억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는 사유의 심연이자 우주적 규모의 차원이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던 까닭은 그 엄청난 정보의 층위를 온전히 소화해 내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거대 담론을 문장으로 길들이지 못한 데서 오는 지적인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글의 소재로 끌어오고 싶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 그 한계를 통감했기에 ‘공간’은 내 머릿속에서 정체 모를 망상의 유령처럼 떠돌 수밖에 없었다.


글의 소재를 찾는 일은 그만큼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매일 한 단어, 한 순간을 낚아채 글로 끌고 가는 일은 때로 소를 도살장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힘겹다. 글쓰기는 케렌시아(querencia ; 안식처)여야 한다. 자신만의 안식처,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회복의 공간이어야 한다. 글을 쥐어짜는 압착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은 기억의 공간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하루로 삼아야 한다. 어제의 '공간'이 미완으로 남았다는 것은, 그 주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 경계의 어딘가에서, 제대로 글의 소재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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