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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15. 2020

'경고'가 '짜증'으로 바뀐 "안전 안내 문자"

문자가 전송되었다고 휴대폰이 부르르 부르르 떨며  알려줍니다. 문자가 전송되어 오면 빨리 읽어보기 위한 기능이 이젠 노이로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역할을 하루에도 많게는 대여섯 건씩 들어오는 '안전 안내 문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만연하기 전에는 '안전 안내 문자'가 그런대로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태풍이 불거나 비가 많이 내리거나 하면 안전에 주의하라는 경고 문자를 보고 경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기능이 빈도수가 잦다 보니 공해가 된 느낌입니다. 특히 코로나 19와 관련된 문자가 집중되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그러려니 합니다만 여러 명이 있는 공공장소에서는 황당하고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경보음이 울려대면 마치 곧 전쟁이라도 터질 기세처럼 느껴집니다. 


국가차원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어떤 상황이 예측될 때 사전에 고지를 하는 이 '안전 안내 문자'시스템은 정말 좋은 발상이자 IT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사례입니다. 취지와 실행은 정말 좋으나 요즘처럼 코로나 19로 인해 거주지 소속 구청과 중대본으로부터 확진자 발생 사실과 역학조사 진행 중이라는 내용과 거리두기 수칙 준수 안내들이 계속 들어올 때는 슬슬 짜증으로 바뀝니다.


문자를 보낼 때는 관계자 분들께서 고민을 많이 하시고 최소한의 정보와 사실만을 엄선해 보내고 계실 것입니다. 안 알리면 안 알린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알리면 너무 많이 문자를 보낸다고 불평을 하니 난감하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문자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문자들도 마구 들어온다는 겁니다. 특히 주거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갈 때 지나치게 되는 해당 구청에서 보내는 문자도 자동으로 접수가 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쪽 구청 지역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는 경우에도 안전 안내 문자가 들어오기도 합니다.

과유불급입니다. 코로나 19 정국이 워낙 위태위태하여 안전 안내 문자를 통해 경각심을 갖는 것도 좋은 예방일 수 있으나 계속해서 확진자 동선을 알리는 수준의 경고 문자는 이젠 양치기 소년의 늑대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경고하고 경계하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매번 경계심을 늦추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 진짜 위기가 왔을 때 무감각해지는 역효과로 작동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경고를 할 때는 진정성과 정확성이 생명입니다. "대충 그럴 것으로 에상되어 경고했다"는 수준은 책임회피와 면피의 대명사일 뿐입니다. 그나마 국가적으로 어떤 위기를 감지했을 때 온 국민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한 이런 시스템은 참 잘한 방책입니다. 취지를 잘 살려 경고의 정확도까지 높였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쌓여가는 숫자의 나열은 이제 그만 알려줘도 될 듯합니다. 확진자의 이동 동선에 제삼자는 관심 없습니다. 구청과 해당 보건소에서 철저히 동선에 따라 방역을 하면 될 일입니다. 식당을 방문했다면 해당 식당을 방역하고 바이러스 소멸기간 동안만 손님을 안 받게 하면 됩니다. 굳이 모든 사람이 그 식당이 어디인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식사하러 그 식당에 갔더니 방역조치로 잠시 문을 닫았네하고 방문자만 알면 됩니다. 동네방네 문자를 보내 해당 식당을 인민재판식으로 매도하는 분위기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손님 받은 식당은 무슨 죄인가요? 코로나 19 확진자라고 이마에 써놓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사실을 전한다고 다 진실일 수 없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다 잘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열심히 하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어느 정도 성숙되면 우열을 가리는 지혜가 필요해집니다. 지금 코로나 19 정국에 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무작정 부르르 떨어대는 휴대폰의 진동과 경고음을 선별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안전 안내 문자에 무감각해져 가는 것도 적응입니다. 적응은 변화의 사이클을 감지하고 있기에 다가올 미래 상황을 예측할 수 있게 합니다. 무감각해진다는 것은 바로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시해도 생존에 지장이 없습니다. 당연히 에너지 분배를 최소화해서 다른 위협에 대처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존 본능은 바로 이런 기재를 따라갑니다.

기온의 변화에 예민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온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는 것만이 살아남습니다. 생존의 경계는 아닐지라도 적응의 시간차는 신체의 부적응을 불러옵니다. 바이러스 침투에 무력해집니다. 면역과 적응을 통해 이겨내는 진화를 습득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가장 민감해하는 것이 바로 온도이기 때문입니다. 숫자로 표시되는 온도계의 숫자마다 가장 적절히 적응한 생명체의 Hierarchy가 존재합니다. 인간은 평균기온 20도를 오르내리는 온대성 기후에 적응한 종입니다. 이 기온에서 가장 적절하게 수용성 이온들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대의 사막과 혹한의 북극에서도 생존해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극단적인 적응은 특별한 생존의 가치를 맞바꾸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아침 바깥에 안개가 자욱한 것을 눈치채셨나요? 바로 낮과 밤의 기온차가 커서 발생하는 안개입니다. 가을이 다가와 있음을 아침 안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기온의 차가움은 가을 색으로 전환하는 '시간 갈이'를 하는 진통이 아닌가 합니다. 한 번에 확 변하기에는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잔열을 겪고 나서야 새로운 탈피를 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 말입니다.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혁명을 통해 한번에 변혁을 하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그 충격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물론 준비된 혁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변화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치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닥친 변화의 혁명은 많은 뒤치다꺼리들이 따릅니다.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서히 바뀌어 나가는 점진적 변화는 외부적 충격을 보다 완화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인 표현으로 변화에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좀 더 나은 것으로의 진화일 수 도 있고 낮은 곳으로의 퇴행성 변화도 있습니다. 자연의 변화에는 방향성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자연선택에 맞게 적응에 따를 뿐입니다. 이 시간 차가움으로 향한 계절의 변화는 점진적 변화임에 틀림없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간에는 다소의 혁명적 변화들도 끼어듭니다. 이를 환절기라 표현합니다.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서 신체 적응기를 놓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 요즘입니다. 그래서 '차가움'은 경고입니다. 곧 기온이 낮아질 거야 비도 오고 바람도 많이 부니 덧옷을 준비해야 할 거야 이런 경고입니다. '안전 안내 문자'에 익숙해졌다면 이젠 날씨의 경고에 적응해 익숙해질 때가 되었습니다. 철저히 경계하고 조심하여 안전한 '계절 갈이'를 해야겠습니다. 기온이 낮아지는 환절기가 되면 바이러스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심 또 조심하되 양치기 소년의 허영과 얼치기 행동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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