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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14. 2020

출근길 동행자 - '가을'

햇살이 찬란한 상쾌한 아침입니다. 이제는 감히 저 하늘을 '가을 하늘'이라고 이야기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습니다. 풀벌레 소리가 매미 소리를 대체하고 기나긴 장마의 터널 속에 갇혔던 푸른 하늘이 드러남도 그렇습니다. 짙은 초록 속에 감추어져 안보이던 모과 열매도 옅은 노란빛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대추도 감도 그 빛깔을 나뭇잎 색과 달리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을'은 이렇게 아침 출근길을 같이 걷는 동행자였습니다.


인간은 늘 비슷한 관성으로 살아내는 것 같은데 자연은 항상 변화무쌍합니다. 구름이 낀 날, 비가 오는 날, 오늘처럼 화창한 날 등 어느 하루 같은 날이 없지만 또한 그 변화 속에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움직이는 오묘함이 있음도 눈치채게 됩니다.


이 아침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또 그래 왔고 그렇게 되고 있을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지만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는 놈에게 얽매이기도 하고 쫓기기도 하고 따라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것들은 그 안에서 만들어지고 굳고 없어지고 합니다. 불확정성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건의 지평선을 말하지 않더라도 특이점에 다다라 곧 폭발하듯 시공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시간의 흐름에서 헤어 나올 수는 없는 것이 '산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에너지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 우주에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글거리는 태양도 수소를 원료로 핵융합을 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에서부터 움직이지 않는 암석에까지 에너지의 공존을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찰나의 시간을 지구의 지표면에 생명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하나로 겸허하게 세상을 볼 일입니다.


당장 아침에 눈을 뜨고 부랴부랴 집을 나서고 직장이라는 곳에서 다른 존재들과 끊임없이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살도록 운명 지어졌다면 너무 운명론자로 보일까요. 어찌 왔던 지금 숨 쉬며 살아내야 하는 현실에 던져저 있습니다. 오고 싶어 이 세상에 나온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어떤 존재도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에 올 수는 없습니다. 


오고 간다는 것은 출발점이 있고 종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는 시간 가는 시간은 알 수 있지만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는 뚜렷하지가 않습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처음과 끝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아침의 사유 치고는 너무 깊고 넓었나요 그래도 들여다보고 둘러보는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본질을 어렴풋이나마 접할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는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이 아침 찬란한 햇살 한 줌에 깊은숨 한번 들이마시는 것이 행운임을 알게 해 줍니다. 끊임없이 탐구해 외연을 확대할 일입니다.


알아도 살 수 있고 몰라도 살 수 있는데 굳이 머리 아프게 알려고 하지 않아도 똑같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알면 생각이 풍부해지고 세상의 모든 현상을 알아챌 수 있게 됩니다. 삶이 알차게 되고 여유가 있게 됩니다. 선택은 자유의지입니다. 돼지 발에 채워진 진주가 진주임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주가 진주임을 알아채지 못하면 그저 똥밭에 구르는 구슬일 뿐입니다. 존재의 위대함을 알아가는 희열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토요일은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그 덕에 어제부터 저 푸른 하늘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나 19로 인해 집안에 갇혀 지나다시피 보니 머릿속이 약간 묵직한 느낌입니다. 뉴런들이 팽팽 돌아다녀야 하는데 속도가 느린 것이 확 느껴집니다. 브레인은 주마가편을 해야 제대로 돌아가는가 봅니다.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인데 어떤 일을 마주하던 달려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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