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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21. 2020

'산다는 것'은 '기억'을 이어가는 것이다

새벽. 휴대폰 알람 음성인식이 작동합니다. 부스스 휴대폰을 쳐다봅니다. 화면에 아침 온도 16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계절의 전환기에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아침 기온은 계속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한낮의 뜨거움에 차가워짐을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양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이 시각부터 다시 열에너지가 득세할 겁니다. 그러나 이젠 뜨거움보다 따뜻함을 이야기합니다. 밤낮으로 급격히 차이나는 기온차가 빚어내는 적응의 간사함 때문입니다. 지금 이 아침은 어떤가요? '상쾌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늘 아침의 모습일 겁니다. 덕분에 머리가 명징 해지는 느낌입니다. 머릿속에 말끔한 푸른 하늘빛 가운데로 흰구름 한 조각 떠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급격한 기온차로 인하여 신체기능이 제대로 따라잡질 못합니다. 코로나 19가 득세하는 통에 감기 증상 하나라도 신경 쓰이는 요즘입니다. 편도선이 약해 환절기만 되면 편도선 염증을 가볍게 앓고 가는 저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저녁에 창문을 꼭꼭 닫고 이불도 뒤집어쓰고 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은 목이 칼칼한 듯합니다.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참 간사한 것이 인간이라고, 하루하루 달라진 기온차에 즉각적으로 신체 반응을 일으킵니다. 생명의 역사가 적응의 역사이기에 당연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빛의 계절에서 어둠의 계절로 서서히 기울어가면 우리 몸을 반응케 하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영향을 받습니다. 햇살을 적게 받으면 신경계를 흥분시키는 도파민과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듭니다. 그러면 조금씩 우울해지고 센티멘탈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태양빛을 따라 자연을 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산으로, 들로 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산과 들에 사람이 넘쳐나는 이유가 자연이 주고 자연이 부르는 본능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코로나 19가 이 본능조차 막아서고 있으니 진화심리학을 다시 써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생명은 '다윈 진화하는 분자 시스템'입니다. 바로 생명을 구성하는 분자는 탄소(C), 수소(H), 질소(N), 산소(O), 인(P), 황(S) 이 전부입니다. 오늘  아침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도파민의 분자식은 C8H11NO2이며 세로토닌은 C10H12N2O입니다. 두 신경전달물질이 모두 탄소와 수소, 질소, 산소 4개 분자의 결합일 뿐이며 그 결합의 배열이 다르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6조 개가 넘는 세포들도 그 근원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모두 분자들의 합성과 조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생명은 주기율표에 나오는 118개 원소 중에서 일부를 분자들의 연결고리로 활용합니다.


기원을 따라가 들여다보면 바람이 부는 이유, 기온이 내려가는 이유 그리고 그 안에 생명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 존재의 이유를 또한 어떻게 감각하고 인식하고 지각해 생각과 기억으로 만들어내는지도 알게 됩니다. 리듬이라는 것입니다. 기억의 본질입니다. 기억은 브레인에서 일어나는 시냅스의 화학적 전압 펄스의 하나일 뿐이기에 전압 펄스의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짐"입니다. 기억의 어느 순간 어느 곳을 트리거하면 그 이후의 연결고리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를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고 흥얼거립니다. 그 흥얼거림 속에 같이 묻혀있던 기억의 흔적들이 되살아납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기억에 의지합니다. 기억이 없으면 세상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눈을 뜰 수 도 없으며 하품을 할 수 도 없으며 옆에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이상으로 여기는 국가라는 존재도 허상일 뿐, 그저 공동체 존재들의 공통 기억일 뿐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자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허상인지도 모릅니다.


소피스트의 궤변으로 세상을 보는 듯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기억의 작용과 노래의 리듬이 맥을 같이 함도 알게 됩니다. 세상은 그런 것이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떠올려 오늘을 살 것인지 되돌아볼 일입니다. 그러면 겸손해지고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맑은 하늘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자판을 움직이는 손가락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어제 살다 간 이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던 시간이었다"면 내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음에 순간순간 감사하며 살 일입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그대와 마주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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