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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08. 2021

나는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새로운 것, 내가 모르는 것을 접하게 되면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궁금해집니다. "저건 뭐지?"라고 말입니다. 당연한 겁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 호기심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알아야 생존에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상대하는 것은 나에게 우호적 일지, 나쁜 일을 일으킬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경계를 하게 됩니다. 경계를 한다는 것은 위협을 줄 것인지, 안 줄 것인지 파악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어도 역시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명확히 설명해 나가는 '앞선 자'들의 노력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생각을 접합니다.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일상이지 않나 싶습니다. 새벽에 읽던 책을 덮고 앞의 내용을 회상해 봅니다. 떠오르는 문장이 거의 없습니다. 눈에 띄는 문장에는 형광색 펜으로 줄을 그으며 읽었는데도 그렇습니다. 바로 눈으로만 봤지 기억의 저장고까지 밀어 넣지 못한 것입니다. 관련 분야의 지식에 허약한 스펀지였기에 읽으면서도 제대로 흡수를 못한 탓입니다. 얼마나 무지한지 지식의 바닥을 보는 것 같은 화끈거림이 있습니다. "지식의 허영"에 빠져 시간만 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고 나면 어영부영 살아온 뒷 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도 그나마 호흡 하나 눈길 하나에도 집중했던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얼마나 찰나 같은 순간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찰나의 시간만 깨어있다 보니 깨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묻혀가고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부단히 찾고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근원을 따라가고 들여다보고 그 끝에는 또 어떤 시작이 계속될 지라도 파랑새를 쫒아 가봐야겠습니다. "앞선 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 입자 수만큼이나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도 보게 될 겁니다. 그 안에서 어울려 있는 자아의 본질도 보게 될 것입니다. 굳이 깨달았다고 자평하지 않아도 종교에서 말하는 성불과 들림을 당하지 않아도 본래무일물의 모습을 알게 된다면, 산다는 현실의 이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알게 될 것입니다. 한 줌 호흡의 소중함과 손가락 근육 하나 움직임의 경이로움까지 매시간 매 초를 환희로 받아들일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무얼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무지에서 깨어날 수 있기를 온 감각을 곤두세우고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주문을 외웁니다. 주문을 외우면 마법같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주문은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은 집중된 노력입니다. 노력은 실천입니다. 실천은 곧 이루어집니다. 될 때까지 할 테니까요, 결국 주문은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아브라 카다브라(abra cadabra ; 말한 대로 될지어다)


종교는 그렇게 인간의 뇌리에 자리를 잡습니다.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이 그 자리에 터를 잡았고 근세 인류를 지배한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습니다. 바로 삶을 규정짓는 방식에 공동 패턴을 형성하는데 종교는 가장 큰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했더니 이루어졌도다"


하지만 꼭 종교라 규정짓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 종교의 형식을 항상 달고 있습니다. 기독교다 불교다 천주교다 하는 것은 형식이며 제례입니다. 삶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틀을 어떤 모양으로 가져갈 것이냐에 대한 분류일 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일도 종교에서 도용해 쓰고 있으며 천체가 운행하는 자연의 이치도 종교가 경전으로 법전으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결국 종교는 인간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동 패턴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종교가 기복신앙보다는 한 차원 높은 형이상학적 접근일 수 있으나 결국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기저엔 복을 일으키는 기복이 바탕입니다.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위하지 않고 교회로 성전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기도를 하던 묵상을 하던 참선을 하던 무언가 이루기 위한 방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명분도 결론은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깨우침이 새로운 주문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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