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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05. 2021

정의의 여신, 디케

대법원 디케 상을 먼저 바꾸어야 할 듯합니다

'거짓말' '탄핵' '참담함' '막장 드라마'

오늘 아침 신문지면을 장식한 단어들입니다. 자극적인 제목을 뽑는 언론의 옐로 저널리즘적 현상이라고 하기엔 낯간지러움을 넘어 정확한 표현이다 할 정도입니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려니 했지만 현실로 눈으로 귀로 보여주고 들려주어 그 수준을 재확인시켜주니 허탈할 따름입니다. 최고의 정의와 지성이라는 대법원 수준이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어찌 되었든 최종 판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정치적 입김이 작용했을 것 같은 사안의 결론조차 합리적인 판단을 했을 거란 믿음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최고의 지성과 정의를 실천하는 곳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굳건히 소신을 가지고 판결에 임하고 정의를 실천한 법조인들이 계셨고, 계시리라 믿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 믿음이 서서히 붕괴되다가 드디어 완전히 괴멸되는 현장을 목도합니다. 우리 사회의 정의가 무너진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정말 참담할 뿐입니다. 불도저와 포클레인을 동원하여 깨끗이 치우고 새 건물을 지어야 할 텐데 가능한 사회일까요? 며칠 지나면 다시 당정청이 작당하고 들러리 서고 야합하는 인물들이 다시 새 건물을 차고앉을까 두렵습니다.


이 '사법부의 정의'에 대해, 하늘의 소천을 거부하고 본인이 길을 선택한 故 노회찬 의원이 생존해 계셨을 시절,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했다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었는데 다시 떠오릅니다.


우리나라 대법원 본관에 있는 디케 상은 외국의 경우와 다르게 조각되어 있다는 겁니다. 보통 정의의 여신인 디케는 눈을 가리고 오른손엔 칼을 들고 왼손에 천칭 저울을 들고 서있는데 우리나라 대법원의 디케 상은 눈도 안 가리고 한 손에 법전을, 또 한 손엔 저울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이 디케 상을 보는 故 노회찬 의원의 촌철살인이 압권입니다. "눈을 가리는 것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점을 상징하는 것인데 눈을 안 가리고 있으니 상황을 두 눈뜨고 비교해서 보겠다는 것이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는 것은 엄정하게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법조문에 따라 눈치를 살피면서 판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느냐"는 지적입니다. 권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정의와 균형을 추구하는 여신으로서의 사법권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함을 풍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풍자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경각심을 줬다는데 故 노회찬 의원의 촌철살인이 힘을 발휘합니다.


사실 조각은 상징입니다.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눈을 가렸는지 아닌지, 칼을 들었는지, 법전을 들었는지에 대한 상태는 인간이 부여하는 상징을 어떻게 각인시키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의 원형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아스트라이아'입니다. 하늘의 천칭 별자리 신화의 주인공입니다. 이 주인공이 로마로 건너가면서 유스티티아(Justitia)로 개명을 했고 이 이름이 정의를 뜻하는 Justice로 이어집니다. 15세기 전까지는 디케의 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만 희곡이 유행하던 15세기 이후 본래 눈을 뜨고 정의를 지키던 정의의 여신이 마치 눈을 가리고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정의를 지키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하는 풍자로 나오게 됩니다. '눈을 가려서 사사로움을 배제한다'는 상징은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디케 상이 꼭 눈을 가려야 하는 이유도 없으며 디케의 출발인 유럽의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만들어진 수많은 디케 상에도 어떤 조각은 눈을 가리기도 하고 안 가리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때그때 시대상이 변하고 조각가의 해석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디케 상이 한국의 대법원에 만들어지면서 한국적 감성이 가미되었습니다. 동양적 관점에서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정의를 바로 봐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을 할 수 있고 서있기보다는 앉아 있는 것은 동양에서 절대자는 서있기보다 앉아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칼로써 단죄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현실보다는 법전에 근거한 합당한 판결을 통해 조화를 추구하는 관념이 더 강하게 작동했을 수 도 있습니다.


어떤 해석과 어떤 풍자가 더 어울리는지는 시대가 말해줍니다. 그 시대 그 역사에 그 해석이 어울리면 그렇게 받아들여집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똑같은 조각상을 보고 상징을 해석하는 방향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긍정의 관점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대법원 디케 상이 노회찬식 해석으로 더욱 가슴에 와 닿은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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