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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09. 2021

코로나시대, 성격보다 관점을 바꿔라

사람의 성격은 바뀔 수 있을까요? "어려서는 내성적 성격이었는데 크면서 외향적으로 바뀌었다"라고 하면, 맞는 말일까요? 이것은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니고 사회적 매너나 화법과 같은 기술이 향상된 것입니다. 사고능력과 성격은 '기질'입니다. 타고난다는 것입니다. "아닌데, 내 성격은 부모님 어느 쪽도 안 닮았는데?"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다리 밑에서 데려 왔거나 부모님의 성격이 반반씩 유전되어 전혀 다른 새로운 개체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반적으로 타고나는 기질이어도, 지능지수는 20살 전후까지도 계속 향상되지만 성격은 15살만 되어도 변하지 않는답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그래서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 성격이 변하지 않는 사례들은 주변에서 너무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당하고 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고 나면 예전과 똑같아지는 것을 수없이 목도합니다. 시지프스의 돌과 같습니다. 고쳐야 할 것조차 이렇게 고쳐지기는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이 힘듭니다.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고 끊임없이 고치려고 해야 겨우 막아내고 그나마 뒤로 밀리지 않게 버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낙관적인 성격을 가졌다" "긍정적인 성격이다"라고 평가받고 인정을 받는다면 부모님께 감사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타고나도록 유전적 형질을 물려주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성격을 낙관적이다, 비관적이다, 내성적이다, 외향적이다라고 구분하지만 사람을 그 범주로 선을 그어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에는 수십 가지의 성격적 측면이 모두 공존하는데 그중에 어떤 것에 더 민감하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성격을 그중에 더 민감한 부분을 부각해 정의해왔던 것입니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자네는 너무 내성적이야"라고 하면 정말 내성적인 줄 착각하게 되고 그렇게 행동하고 사고하게 됩니다. 다양한 성격의 개념들이 내 안에 혼재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에 집중해 보는 겁니다. 내 안에 다양한 성격이 혼재되어 있듯이 타인도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거란 기본 전제가 서있으면 다양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다양성은 자연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자연의 건강함을 살펴보는 바로미터가 바로 종의 다양성이듯이 말입니다. 획일화되고 단일화되면 적응력이 떨어져 결국에는 사멸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왔고, 이는 사람들의 인지 작용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좁은 국토에  오밀조밀 살아온 지리적 특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큰 대륙에서 한국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 일기예보를 들으면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답니다. 우리 일기예보에는 가끔 "내일 아침은 전국에 비가 내리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들을 수 있는데 "전국에 비가 내린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큰 대륙에서는 한 번도 날씨가 같아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크기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보니 전국에 비가 온다는 획일적 멘트가 어색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우리 사회는 바로 관점의 다양함에 대한 이해조차 이렇게 지리적 지역적 관점으로 단일화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른 행동을 하면 관점이 다른 게 아니고 성격이 안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라고 인정보다는 비난을 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기본적 인식의 부족이 성격을 획일적으로 구획 짓는 데까지 발전해 있습니다. 다른 말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성격이 안 맞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다양성이 공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것은 역시 상대방을 존경한다는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야 토론도 되고 협의도 가능합니다. 또한 과거를 가지고 논의를 해서는 절대 합일점을 잦을 수 없습니다. 미래를 놓고 논의를 해야 합의가 가능합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인정해야만 공동의 해결과 합의가 가능해집니다. 아주 간단한데 우리 사회는 왜 안되고 있을까요? 상대를 인정하면 내가 왜소해지고 내가 못나 보이도록 학습되어 그런 것일까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점으로의 전환이 빨리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해내야 합니다.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에서 수없이 도태되어 사라진 종의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점을 바꾸면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의 건강함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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