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May 27. 2021

'안심시키는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사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떻게 이렇게 만인만색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 펼쳐지는 오묘한 사건들을 대하는 시선의 다양성 정도는 이해가 간다고 해도 심지어 자연에 펼쳐지는 현상을 보고도 천차만별로 해석해냅니다.


오늘 아침 회색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집을 나설 때는 그저 흐린 정도였는데 전철역 계단을 올라서니 제법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집을 나서며 흐린 하늘을 보는 순간, 런던의 모습이 확 덮쳐 왔습니다. 29년 전과 7년 전 런던에 두 차례 갔었지만 오늘 아침 흐린 서울의 하늘과 제 기억 속의 런던의 하늘은 어떤 연관성으로 오버랩되어 다시 떠올랐을까요? 단지 흐리다는 현상 하나뿐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현상은 내가 경험한 경험치의 한계 내에서 조합되어 다시 되새김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고 느낀 대로 생각하게 되고 행동하게 됩니다. 만인만색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렇게 상대성과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본질의 이면에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데로만 정보를 수용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생각 패턴이자 행동 패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의 현상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본질과 진실을 보는데 인색해집니다. 아니 인색한 줄도 모르고 현상을 해석합니다. 해석에 오차가 발생합니다. 바로 '불편한 진실'이 작동합니다. 요즘 세계적인 화두인 탄소배출 절감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이산화탄소가 지목된 이후 이 탄소 절감을 위해 풍력과 태양광 발전을 이용한 에너지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산과 밭을 밀어버리고 태양광 패널을 깝니다. 오직 태양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다른 에너지를 희생시키고 있음에도 우린 발전 생산량만 쳐다봅니다. 원자력 발전소 제로를 선언하며 가동을 줄여가는 사이, 화력발전소 굴뚝의 연기는 더욱 거세게 올라가고 있지만 쳐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 '불편한 진실'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적이 있습니다. 2006년 미국의 전 부통령이었던 엘 고어가 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고 지구온난화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제목 자체가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엘 고어는 수많은 비난에 직면합니다. 자연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후를 팔고 탄소세를 만들어 돈을 벌려고 한다는 비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불편했을 뿐입니다. '안심시키는 거짓'이 더 편해 보였기에 안심시키는 쪽으로 몰려 갑니다. 진실이야 어떻게 되었든 일단 불편한 것은 싫은 것이 인간 심리입니다. 거짓일지라도 지금 당장 그것이 거짓인지 누구도 증명하려 하지 않기에 안심되고 편안하면 아무 생각 없이 거짓 쪽에 줄을 섭니다. 거짓에 줄을 섰지만 이 줄이 거짓 줄인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편안하고 안심된다는 것은 그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고 안정되어 있는 것은 정당하고 올바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고 치환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안심시키는 거짓'이 '진실'로 둔갑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국내에서도 수없이 많이 목도해 왔습니다. 황우석 사태가 그랬고 수입 소고기 파동이 그랬습니다. 어제자 조간신문에 '한국적인 것은 없다'의 저자이신 탁석산 철학자께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할 K'라는 사례를 쓰셨습니다. "한국 고유의 문화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한국적인 문화가 아니라 수준을 높이는 문화가 중요하다"라고 지적을 하십니다. 사례 중 하나로 "손흥민 선수는 대한의 아들인가 개인의 성취인가"라는 의문을 던집니다. 손흥민은 세계적인 축구 선수 반열에 있습니다. 국가가 손흥민 선수가 세계적 선수가 되는데 해준 게 무엇이 있을까요? 병역 혜택 주고 대한의 아들로 입양을 한 걸까요? 저자는 개인적 차원의 성취로 해석을 하십니다. IMF 시절 박세리와 박찬호의 활약은 곧 한국의 자부심으로 통했습니다. 80년대 이전에는 더 심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시내 카퍼레이드를 펼쳤고 어김없이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딸이라 불렀습니다. 심하게는 스포츠의 승리를 국가의 승리로 포장을 했습니다. 저자는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의 플레이를 펼치는 한국 선수들의 기량 자체를 즐겨도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안심시키는 거짓'이 판을 치고 위선과 내로남불이 득세하는 꼴이 가관일수록 '불편한 진실'이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다소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진실'에 다가서고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실은 곧 본질이기에 그렇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 본연의 색깔과 형태를 지녀 그 형체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 그 진실은 항상 그 모습으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맥주 한 캔의 작은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