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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03. 2023

조금 더 뒤로 가고, 조금 더 내놓을 수 있는 용기

한 사회가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면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들의 복합체임에도 어찌어찌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단위가 가족, 회사일 수도 있고 국가를 넘어 글로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의 발로임도 눈치채게 됩니다. 곧 망해도 시원찮을 그런 사회나 공동체조차 굴러간다는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한 저변의 힘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살만한 것과 살게 하는 것의 힘이 조롱과 비난으로 점철된 사회의 바탕에 있기에 평균값으로 수렴되어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악이라고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좋은 세상이 올 듯도 하지만 그 '악'이라고 규정하는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조차 일치시키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양성이 사회문제를 해결 쪽으로 들어오면 복잡해져 실마리를 풀 수 없을 만큼 엉크러 지게 됩니다. 엉크러 짐 자체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도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이 모여 사회가 구성되고 계약에 의해 서로에게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고 인정합니다. 호모 사피엔스 이래로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사회형태입니다.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이 사회도 다윈의 진화론적 방향을 지향합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공화정 사회와 나라도 있고, 북한처럼 겉으로는 인민 평등을 주장하지만 세습독재가 살아 있는 곳도 있으며, 권력을 잡기 위해 내전을 벌이는 나라도 공존합니다. 인위선택이 아닌 자연선택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은 지구표층사에 각인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환경에서는 눈먼 시계공처럼 조작하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때로는 잠시 그것이 먹혀들기도 합니다. 사라지지 않고 환영처럼 유전자에 숨어있다 발현됩니다. 

이들 얌체유전자를 드러내는 존재들은 경각심을 주어 사회가 바로가게 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합니다. 싹 쓸어 없애버리면 더 좋게 될 듯도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체적 존재가 아닌 허상의 흔적이기에 없앨 수가 없습니다. 여름철 잡초 올라오듯이 계속 등장합니다.


사회는 이들 얌체유전자를 용서할 용기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코끼리 옮기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성사되기 어려운 일들의 상징적 집합체인 코끼리를 풀이 많은 초원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덕목입니다. 


국민연금법 개정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이 관계되어 있고 평생 계약조건에 맞게 월급에서 공제를 해가며 누적시켜 왔기에 그 계약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권리로 작동합니다. 계약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논리도 합당하고 정당합니다. 그리고 급격한 인구감소로 인해 연금시스템이 적자구조로 바뀌고 지금 청년세대들이 그 부담을 온전히 떠안아야 하기에 개선해야 한다는 논리도 맞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국민연금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지금은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수립해 그 해법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구하는 단계입니다. 십시일반으로 부담을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다면 연금은 파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령대별로 더 내고 덜 받는 비율을 세부적으로 달리해서 부담하게 하는 것도 방법일 것입니다.


코끼리를 옮기기 힘들다고 그냥 방치하면 결국 한 발자국도 못 가고 결국에는 서로 피해를 보게 됩니다. "내 남은 인생에서는 오지 않을 일이라고?" 꼰대적 근성으로 버티거나 "그나마 그거 믿고 버텨왔는데 말년에 그것조차 줄이겠다고?"라고 반박하면 연금 코끼리는 옮기기도 전에 말라죽고 맙니다. 


노인의 지혜는 관용과 아량에 있습니다. 다 살아봤고 경험해 봤기에 내놓을 수 있는 여유입니다. 이것이 없거나 부족한 노년은 초라해 보입니다. 쫌생이 노인네 취급을 받습니다. "가진 게 있어야 여유를 부린다"는 볼멘소리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지혜는 거기에서 나옵니다. 없어도 더 줄일 수 있는 공간을 찾아냅니다. 관용과 아량은 양보와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스스로 나서는 겁니다. 그래야 손해를 본듯해도 손해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금씩 물러서고 내놓을 때, 조금 더 뒤로 가고 조금 더 내놓을 수 있는 용기는 노인과 어르신이 가진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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