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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02. 2023

만국기 걸린 초등학교 운동장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바로 뒤편에 중화초등학교가 있습니다. 8층에 살고 있는데 주방 창문으로 학교운동장이 내려다 보입니다. 집에 아이들의 나이가 이미 29, 24살인데 둘 다 이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초동학교의 역사가 77년이나 되었다는군요. 서울시에 있는 초등학교 중에서도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학교 출신은 아닙니다. 1999년 이 학교 바로 앞에 아파트를 신축할 때 분양받아 입주한 이래로 아직까지 떠나지 못하고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 녀석 태어나던 해 이사를 왔으니 한 집에서 오래 살고 있긴 합니다. 25년 가까이 살고 있는데 집안 인테리어는 크게 바꾸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와이프는 오래전부터 이사를 가자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지만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철역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직선거리로는 30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지라 창문을 열어놓으면 전철이 역사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전철이 오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아파트 주변에 조금 걸으면 산책할 수 있는 산들이 두 개나 있습니다. 주거 환경은 최적인데 아파트 가격이 서울시내에서 가장 낮은 곳 중의 하나인지라 좌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살기 좋은 곳은 집값이 낮고 살기 나쁜 곳은 집값이 비싸다"는 정설을 믿고 자가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옆 집 이야기'를 하려다가 아파트 집값을 이야기하는 부동산 소식으로 흘러가버렸네요. ㅠㅠ


아침 출근준비를 마치고 냉장고를 열어 우유 한잔을 준비해 마시면서 주방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봅니다. 바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만국기가 가득 걸려 있습니다. 이번주 금요일이 어린이날이라 행사준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걸린 만국기를 보는 순간, 50년이 지나간 머릿속 초등학교 운동회가 활화산처럼 피어오릅니다. 지금이야 초등학교에 학생수가 한 반에 20여 명 정도 수준이지만 '라테'는 한 반에 60명이 넘었습니다. 그것도 제가 국민학교 1학년때 학생이 하도 많아서 학교를 아예 새로 짓고 주변 학생들만 새로 편성하여 반을 만들어서 그렇습니다. 학교를 새로 짓기 전에 가던 국민학교는 학생이 많아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가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소위 베이비붐 세대의 끝물이었던 70년대 초등학교 운동회는 가을 운동회였습니다. 초등학교에서 1년에 하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입니다. 봄 소풍과 가을 운동회입니다. 국민학교 시절 가장 가슴 설레던 행사입니다. 국민학교시절 떠오르는 추억의 대부분은 이 두 행사와 연관되어 있을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일 겁니다. 보통 운동회 날짜가 잡히면 한 달 전부터 학년별로 학년에 맞게 집단체조 연습을 했습니다. 운동회가 학생들을 위한 것도 있지만 학부모님들을 위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그런 무대로도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곤봉에 색색의 줄을 달아 곤봉체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5-6학년으로 고학년이 되면 새끼를 꼬아 올라타고 벌이는 고싸움놀이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반 별로 백군과 청군으로 나눠서 운동복도 맞춰 입습니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달리기'와 '박 터트리기'입니다. 학년별로 대여섯 명씩 100미터 줄에 세워 달리기를 하고 1,2,3등으로 들어오면 손등에 도장을 찍어줍니다. 운동회가 끝나고 등수에 따라 공책과 연필 개수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참여하는 이어달리기가 운동회의 정점을 찍습니다. 난리가 납니다. 누구네 엄마가 잘 뛴다는 등 시끌벅적합니다. 아이들 운동회에서 동네잔치로 바뀌어 갑니다. 그리고 운동회가 끝날 무렵은 '박 터트리기'가 장식합니다. 커다란 바구니에 색종이를 잔뜩 넣고 바구니 두 개를 맞물려 테이프로 봉한 다음 긴 장대에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고 나면 청군 백군 양쪽이 오재미(콩이나 모래가 든 작은 주머니)를 던져 박을 먼저 터트리는 쪽이 이기는 게임을 합니다. 박이 터지면 커다란 '우승'이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펼쳐집니다.


그래도 누가 뭐래도 운동회의 최고 정점은 점심시간입니다. 가족들이 운동회 보러 올 때 김밥 같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십니다. 운동회 중간 점심시간에 운동장 주변의 나무밑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분홍색 소시지가 든 김밥 한 줄이면 최고의 운동회 점심식사였습니다. 거기다 운동회가 열리면 '아이스께끼'를 외치는 '하드 통'장사 아저씨와 정문 앞에서 파는 '솜사탕', 담벼락 밑에 '달고나 뽑기'의 달콤한 유혹도 한 몫했고 톡 쏘는 사이다 한 모금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위기를 띄우던 것이 바로 운동장 위에 걸린 만국기입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국민학교 시절, 만국기가 걸린 운동장에서 흙먼지 풀풀 날리며 뛰어다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오늘 내려다본 초등학교 운동장은 만국기 아래로 초록의 인공잔디가 깔려있습니다. 사각의 운동장 옆으로는 붉은색 우레탄이 깔린 달리기 트랙도 보입니다. 운동장 환경이 흙먼지 날리던 곳에서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뛰어다닐 학생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같은 모습일 겁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장면은 언제 생각해도 가슴 두근거리고 설레는 그런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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