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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31. 2023

원인도 안 알려주고 그냥 대피준비하랍니다 ㅠㅠ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전철을 타고 출근을 합니다. 6시 23분 전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옵니다. 요즘은 아침해가 빨리 떠서 그런지 전철 안에 제법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이 많아 통로를 지나갈 수 없을 정도쯤 됩니다. 다행히 천정에 있는 에어컨이 가동되어 혼잡으로 인한 짜증은 덜 수 있습니다.


매일 전철로 출근하면, 내리고 타는 칸이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출근할 때 전철 출입문 4-4를 이용합니다. 왕십리에서 2호선으로 환승할 때 바로 계단과 연결되는 칸이기 때문입니다. 2호선으로 갈아탈 때면 2-2 쪽 출입문이 있는 칸으로 갑니다. 역시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회사 앞으로 올라오는 계단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퇴근할 때도 탑승하는 칸이 정해져 있습니다. 역시 환승과 내릴 때 빠르게 게이트와 연결되는 칸입니다.


매일 전철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전철 칸을 이용하는 방법은 비슷할 겁니다. 혼잡도 피하고 시간도 절약하기 위한 경험이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매번 같은 번호의 탑승문 앞으로 가게 됩니다.


이 무의식적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지난달부터 제가 이용하는 망우역에 에스컬레이터 교체 공사를 하느라 공사기간 동안 한쪽 계단을 폐쇄해 놓았습니다. 두 개의 계단 중에 한쪽 계단만 이용해 야하기에 사람들이 몰리면 한참을 밀려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플랫폼에 내려야 하는 출입문 번호가 7-4 뒷칸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은 그동안 타던 4-4 번호 앞에 가서 서있다가 내릴 때쯤에서야 "아! 잘못 탔네"를 알게 됩니다. 물론 잘못 탄 것은 아닙니다. 잠시 기다리거나 천천히 군중들을 따라가면 됩니다. 하지만 매번 하던 루틴 때문에 혼잡한 군중 속에 끼어있다는 것이 불편할 뿐입니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매번 퇴근길에 이런 상황을 만납니다. 탑승구 위치를 바꾸면 내려서 빨리 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왜 매번 까먹는 것일까요? 20년 가까이 내재된 습관을 며칠의 의식으로 바꿀 수 없다는 본질을 보고 있는 듯하여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제는 퇴근길에 정신 차리고 바뀐 탑승구를 찾아갔다는 겁니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꾸면 길을 찾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전 탑승구를 찾아 불편함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정신을 차린 것일 겁니다. 불편이 요령을 만들고 생각을 하게 하고 의식을 바꿉니다. 그렇게 도구가 만들어지고 지름길이 닦이는 것일 테지요.


오늘 출근길도 어김없이 4-4 전철 출입구로 탑승을 합니다. 휴대폰으로 이메일 검색을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유튜브 동영상을 봅니다. 어제 퇴근길에 보던 '유시민의 알릴레오 북스' 영상 중에 경희대 물리학과 김상욱 교수가 나와서 강독한 '엔드 오브 타임'편을 이어서 듣습니다. 10여분 정도를 유튜브를 보고 있었을까요? 갑자기 휴대폰에 경보음이 들리면서 위급재난문자라고 뜹니다. 6시 41분입니다. 혼잡한 전철 안에 있는 모든 전화기로부터 경보음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이어져 울리니 사람들이 웅성웅성합니다. 


유튜브 시청을 멈추고 위급재난문자를 봅니다. "[서울특별시]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자입니다. 잠시 다시 읽어 봅니다. 경계경보 발령이라는데 무엇 때문인지 원인이 없습니다. 이런 황당한 경보가 어디 있을까요? 원인도 모르는데 대피하라니?

댐이 터졌는지, 불이 났는지 아니면 미사일 공격인지 원인을 알아야 대피 방법도 달라질 텐데 그냥 대피준비를 하랍니다. 읽자마자 "역시 공무원 아저씨들 또 책임회피를 위한 면피성 문자를 발송했구나"를 직감합니다. 위기상황이 왔을 때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매뉴얼로 만들어 놓은 문자를 그냥 발송해 버리는 일이 가끔 등장합니다. 위기관리 훈련을 할 때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보편적인 문구는 미리 만들어놓는다고 쳐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문구를 바꾸거나 고쳐서 발송하는 디테일까지는 익히지 못한 것입니다.


위급재난문자는 전 시민을 상대로 경계와 대피를 권유하여 안전을 담보하는 중차대한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기승전결이 들어가 있어야 시민들이 다음 행보를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이 없는 재난 문자는 안 보내니만 못한 꼴이 됩니다.


찝찝한 마음을 들고 7시에 사무실에 도착하니 회사 건물에서도 경보 사이렌을 울렸답니다. 그리고 잠시 후 7시 3분에 행정안전부로부터 "6시 41분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이라는 문자가 다시 수신됩니다.


지들끼리 손발이 안 맞아서 벌인 해프닝이었습니다.


물론 발단은 북한이 우주발사체를 남쪽 방향으로 발사한 때문이었습니다. 발사체의 탄도와 비행방향 등에 대한 정밀한 정보를 가려내 선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국방부의 기술력도 문제이고 이런 상황을 제대로 공유하지 못해 원인도 없는 위급재난문자를 발송해 버린 담당자들도 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더 뻔뻔한 것은 7시 25분에 서울시로부터 온 안전안내문자입니다. "[서울특별시] 북한 미사일 발사로 인해 위급 안내문자가 발송되었습니다. 서울시 전 지역 경계경보 해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일상으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문자가 왔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경계와 경보는 빨리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상황이 반영되었을 때를 전제로 합니다.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위험을 회피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긴 합니다. 피해서 안전하면 최선이고 안 피해도 되었으면 그것 또한 안전한 것이니 최선의 방책입니다. 하지만 수렵생활을 하던 시절도 아니고 명확히 위험의 원인을 알려줘야 다음 행동을 원활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입니다. 국가 위기관리를 하는 관료들께서는 매뉴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시고 수정 보완할 것은 고치고 시뮬레이션을 더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뒷 일 감당하기 싫어서, 욕먹기 싫어서 그냥 문자발송하는 태만은 없애야 합니다. 국가 성숙도의 척도입니다. 우리 관료들께서 선진화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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