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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27. 2023

거짓과 꼼수로는 벗어날 수 없다

4명이 살고 있는 가정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투닥투닥 의견 충돌이 있고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도 하고 싶은 일이 다르면 화를 내고 싸우기도 한다. 누구는 여름휴가를 계곡이 있는 산으로 가자고 하고 누구는 인피니트 수영장이 있는 바닷가 리조트로 가서 편히 쉬다가 오자고 한다. 의견일치가 쉽지 않다. 그나마 연인이나 가정에서는 티격태격하지만 칼로 물 베듯 금방 금방 해결책을 찾고 양보하고 지나가고 잊힌다.


이처럼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의 인원 속에서조차 이런 현상이 있는데 수천수만을 넘어 수천만 명이 모인 군집사회가 의견충돌 없이 굴러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로 싸우고 찍어 누르고 자기 패거리들을 만들어 아비귀환의 혼돈을 겪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굴러간다. 인류 역사가 거쳐온 흥망성쇠의 사이클 흔적으로도 증명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과 사건들의 반복은 경험을 통해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할 수 도 있을 텐데 그게 안된다. 반복 또 반복된다. 어째 이런 일이 ~~


바로 사회의 규율과 윤리와 법은 학습과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고 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적으로 장착하고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그게 안된다. 돌도끼 허리에 차고 양의 위장으로 물통을 만들어 매고 야생 들판을 뛰어다니던 구석기인이나, 태어나 눈 뜨자마자 디지털 기기를 보고 자라는 우리 시대의 인류나 똑같은 조건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땐 똑같이 벌거벗고 세상에 나온다. 태어난 이후 어떤 도구를 손에 들고 사용법을 익혔는지에 따라 행보가 달라졌던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휴대폰의 문자를 누를 수 있고 유튜브 영상을 조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것은 학습을 통해 후천적으로 익히게 되는 습득하는 기술의 현상일 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기에 어처구니없는 일들의 반복조차 어처구니없다고 자학할 일이 아닐 수 있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감지하고, 최소화시키기 위해 제도를 만들고 법을 만들어 인간행동을 제한하고 규제하고 어기면 신체적 구속을 통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항상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서로의 생각을 내놓으며 합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합의되지 못하는 것조차 법이라는 명문화시켜 놓은 잣대를 적용하여 강제로라도 수긍하게 만든다. 그것이 그나마 사회를 유지시키고 굴러가게 하는 수레바퀴 바큇살 중 하나다.

하지만 너무도 복잡하고 다변화된 사회로 발전하다 보니 온갖 꼼수가 난무하고, 법을 어기는 불법은 아니지만 편법을 통해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활보하는 파렴치들을 보게 된다. 베트맨 같은 정의의 사도가 등장하여 응징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특히나 권력이라는 공인된 폭력을 휘두르는 위정자들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보면 참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거짓이 일상이 된 정치판이다 보니 무엇이 진실이고 진짜인지 혼란스럽다. 거짓도 반복되면 진실로 착각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고도의 반복전술이 판을 친다.


거짓은 감추거나 본래의 의도보다 축소하거나 확대할 때 등장한다. 진실이나 진심이 아니면 금방 들통날 수밖에 없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한번 꼬이면 계속 변명을 하기 위해 꼬인 것을 계속 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논리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는데도 당사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순간 거짓임을 자백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증거를 문서로 녹취로 영상으로 들이밀어야 그때서야 미처 몰랐다고, 없는 줄 알았다고 변명을 한다.


이렇게 거짓으로 신뢰를 한번 잃으면 절대 회복할 수 없다. 용서를 구한다고 사죄를 한다고 머리를 조아려도 소용없다. 정치판은 단판승이다. 그래서 거짓을 해서라도 기어코 이기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스러져간 정치인들의 이름은 나열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많고 지금도 그 명단에 이름을 올라고 있는 인사들이 줄을 서 있다.


"정치인은 형무소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쪽 발은 인간본성의 칼날 위에 서 있고 한쪽 발은 형무소 담장 위에 있으니 진퇴양난일 수 있다.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보폭을 잘 조절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발도 베이고 형무소 담장 안쪽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여럿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거짓은 가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고 진실은 덮는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다. 진실과 마주하는 일은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오해가 없고 거짓이 숨어들 여지가 없다. 해석이 다를 수는 있지만 진실 앞에서의 해석은 의견이 다름을 보여주는 상황일 뿐이다. 해석조차 드러내면 서로 이해를 할 수 있다. 왜 그런 해석을 했는지 말이다. 세상사 모든 일은 신뢰(信賴)를 바탕으로 한다. 믿어야 의지할 수 있다.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신뢰를 잃은 자는 강제로 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는 게 현명하다. 쫓겨나는 모습은 추하게 보인다. 그나마 스스로 걸어 나가면 소신 있게라도 보인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다 보니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측인지심이리도 받을 수 있다. 인지상정은 따뜻할 때도 있지만 추상(秋霜)같이 차가울 때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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