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Aug 21. 2023

여름휴가 디브리핑

열흘 만에 사무실 데스크톱 앞에 앉았습니다. 휴가기간 동안 휴대폰을 통해 이메일을 체크하는 통에 열흘의 공백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혹시 지나친 내용들은 없는지 차근히 되넘겨봅니다. 업무의 이어짐을 다시 연결합니다.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 준비를 하면서는 약간의 설렘과 긴장 그리고 초조함도 공존하는 시간을 겪습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걱정의 가벼운 스트레스이지만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여행기간 내내 전혀 생소한 풍광과 마주하고 안면도 전혀 없는 사람들과 말을 섞고 그들의 음식을 같이 먹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쉼이 됩니다.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상황이 새로운 순간순간으로 날카로운 비수처럼 기억 속에 꽂힙니다. 추후 나의 미래에 어떤 전환의 기회로 다가올지, 통섭의 영역을 확장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순간을 경험한 결과만으로도 시야를 넓히고 높인 것은 분명한 사실로 작동할 겁니다.


"휴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거지. 뭔 잡소리가 그렇게 많아??" "그게 휴가야? 머리 아프게 공부하러 간 거지" "시원한 남태평양 바닷바람 부는 리조트 인피니티 수영장 비치체어에 누워 있는 게 진정한 휴가야 바보야!"라고 한마디 하신다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비싼 돈과 귀한 시간을 쓰고 왔는데, 그곳이 태양빛 작렬하는 휴양지이던지, 선진문물 충만한 도시여행이던지, 무언가 가슴 한편이든 기억 한 곳에나마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기억은 반드시 과거의 기억을 거쳐 옵니다. 지금 보고 있는 것, 먹고 있는 것, 마시고 있는 것조차 예전 기억을 넘어왔습니다.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기억의 단초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열흘동안 무엇을 가슴속에 담고 무엇을 기억의 거미줄에 걸어 놨을까요?


놀랍도록 아름다웠던 풍광은 휴대폰 사진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1,000장에 가까운 사진들이 열흘동안의 기억을 되살리는 트리거가 될 것입니다. 볼 때마다 사라져 가는 기억의 저편을 하나씩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적 유산으로 쌓아 올린 건물과 그림과 조각의 모습 또한 또 다른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놓은 다양성의 단면으로 새겨놓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의 세계가 철저히 적용되는 여행에 있어, 수없이 놓치고 지나치고, 몰라서 '이게 뭔지도 모르고' 거쳐왔을 발걸음의 야속함도 붙잡아 놓습니다.


항상 여행준비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잘 안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저 겉핥기식, 주마간산 격 걷기 운동하다 오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갔다 와서도 "거기 엄청 멋있어. 끝내줘. 내가 본 곳 중에 거의 최고로 멋진 곳이야!"정도의 감탄사만을 전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것은 여행도 아니고 쉼도 아닙니다.

감탄사만 전할 수 있는 정도라면 사진 몇 장 보여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여행은 의미를 찾는 일입니다. 멋진 풍광 속에서 어떤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의미의 단초는 역사를 알아야 하고 사람을 알아야, 하나씩 의미의 줄에 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여행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정해지게 되고 발걸음이 가벼워지게 되고 새로운 것을 만나러 가는 들뜸도 함께 하게 됩니다. 모르고 보면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그저 "와! 멋있는데, 예쁜데" 정도의 감탄사만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열흘동안 고흐와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만나고 16세기 대항해시대 무역의 정점을 찍었던 나라들의 옛 도시들을 찾아 그들이 번영을 누렸던 지혜의 옆모습도 일견 해봤습니다. 기억의 단초와 베이스를 깔았습니다. 이젠 대중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그쪽 지역에 대한 소식이나 도시 풍광이 보이면 기억의 촉이 되살아나 눈에 보이고 귀에 들어올 겁니다. 플랑드르 지역에 대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사서 읽게 되고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와 고흐의 그림을 한번 더 보게 될 겁니다. 그렇게 남겨지는 것, 그것이 기억이 되었든, 사진이 되었든 남겨지는 것이 여행의 유산입니다.


되돌아올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여행입니다. 되돌아오지 않으면 방황이고 방랑이 됩니다. 되돌아 다시 책상에 앉아 있으니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곳이었는지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이렇게 현재 위치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 여행의 참모습인 듯합니다.


부서 직원 휴게실에 지난주 여행을 다녀온 직원들의 간단한 과자 선물들이 많이 놓여 있습니다. 과자만 봐도 직원들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습니다. 마카다미아 깡통도 보입니다. 누군가 하와이를 다녀왔군요. 망고 젤리도 보입니다. 동남아 어딘가를 다녀온 모양입니다. 초콜릿도 보입니다. ㅎㅎ 벨기에 산입니다.


그렇게 다들 소중한 경험들을 담고 모두들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리로 돌아와 있습니다. 다소 햇빛에 그슬린듯한 모습은 여름휴가를 잘 다녀왔다는 증거일터입니다. 그렇게 또 한 여름이 지나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소중하고 귀한 선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