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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24. 2023

결혼기념일에는 뭐 하세요?

오늘은 결혼한 지 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93년 10월 24일이니, 이젠 아련한 기억의 그 어떤 날로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그날 하루 시간 시간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역정 중에서 가장 중차대한 일중의 하나이기에 그럴 겁니다. 그렇게 30년을 걸어왔습니다. 30년 전 오늘은 참 쌀쌀했습니다. 올림픽공원 야외무대에서 결혼식을 하느라 날씨 때문에 전전긍긍했었습니다. 하지만 춥긴 했지만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참 많은 일들이 섬광처럼 일었다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로 되살아났습니다. 허니문 베이비로 큰 딸아이가 태어났으니 29살이고 둘째 막내 녀석이 99년생이니 24살로 군대 갔다 와서 대학교 3학년을 다니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둘이 넷이 됐습니다. 이 시간의 굴곡 속에, 어머니도 기억 속으로 산책을 떠나셨습니다.


30년의 시간 동안 한 집안의 3 세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풍습이 세대교체를 하는 결정적 분기점이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지난 30년은 부모님 세대에서 저의 새대로 넘어왔고 이젠 자식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줄 시간이 되었음도 직감합니다. 그렇게 인륜의 관계는 시간을 따라 흘러갑니다. 이런 흐름을 '산다'라고 합니다.


참, 결혼기념일 때는 어떤 이벤트를 하시나요?


살면서 기념일 두 개는 잊지 말아야 하죠. 배우자 생일과 결혼기념일일 겁니다. 생일 때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만 결혼기념일 때는 작은 선물이나마 서로 주고받게 됩니다. 주로 남자 쪽에서 이벤트를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뭐 자랑까지는 아니지만 그동안 결혼기념일을 잊고 지나간 본 적은 없습니다. 주로 이때에 맞춰 해외여행을 기획해서 실행을 했습니다. 아이들 커가면서는 항상 같이 가족여행의 형태로 다녀왔는데 지난해부터는 아이들이 머리 컸다고 안 따라다닙니다. 작년부터는 부부끼리만 여행을 가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20주년 때는 아이들 데리고 신혼여행을 갔던 하와이를 다시 가기도 했습니다.

올해가 결혼 30주년이라 어떤 의미 있는 이벤트를 할까 하다가 사실 여름휴가를 겸사겸사 유럽여행으로 다녀오긴 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열흘 다녀오면서 결혼 30주년 여행을 퉁 칠 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번달 들어 와이프가 그래도 어디 가까운 곳에라도 가자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이번주말 2박 3일 코스로 그동안 못 가본 포항, 울산 쪽으로 가볍게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저녁에 집 근처 식당을 예약하여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물론 선물도 있습니다. 여행을 가는 것과 선물을 하는 것은 완전 별개로 벌어지는 이벤트가 된 지 오래되어 불합리한 듯 하지만 안 주면 기분이 별로 안 좋은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어 할 수 없이 준비를 합니다. ㅠㅠ 그래봐야 몇 년 전부터는 현금 박치기로 대신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반지다 목걸이다 시계다 가방이다 무얼 살까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현금으로 주고, 알아서 좋은 거 사라고 하면 편합니다. 다행히 명품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부담 없이 합리적인 액수를 봉투에 넣어주면 됩니다. 명품을 좋아하는데 내색을 안 할 수 도 있긴 하겠지만 30년을 살아왔는데 그 정도 눈칫밥 알 정도는 됩니다. 오래전에 사준 명품 백은 지금 장롱 안에서 곰팡이 핀 채로 있습니다. 디자인이 맘에 안들 수 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닌 듯합니다. 해외여행 갈 때마다 들르게 되는 면세점에서 명품점을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면세점 최대 소비 품목이 화장품입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뭐 월급쟁이 남편을 둔 아내의 큰 배려일 수 도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 무언가의 모티브로 삼으려고 하는 심리는 참 대단한 인간의 능력인 듯합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날이 아닐 텐데 그 무심함에 경각심을 주고 주변을 상기시키는 역할로 숫자의 매듭을 짓습니다. 30이라는 숫자가 한 달로 표현되고 저 하늘의 달이 한번 기울었다 차는 대강의 날짜가 됩니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해야 존재로 떠오릅니다. 결혼이라는 시간으로 뛰어들어온 숫자 30은 큰 의미로 되살아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음도 눈치챕니다. 많은 갈등과 오해와 미련과 싸움도 그 시간 속에 녹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구한 시간을 버텨낸 서로에게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같이 살아준 것만으로도 눈물겨워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같이 있으면 귀찮은 존재이겠지만, 없으면 서운하고 필요한 존재로 곁에 있어준 건만으로도 행복한 세월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간을 무심히 지켜봐 주신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이렇게 가정을 이루고 산 30년의 세월을 그래도 잘 살아오게 도와주신 여러분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소주잔 앞에 놓고 처진 어깨를 다독여 주시고 그래도 살만한 세상임을 주지 시켜준 동료, 친구, 지인분들께 다시 한번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30년 더 잘 살아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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