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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15. 2020

천재의 어깨 위에서 과학을 훔쳐보다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으며 사는 것,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똑같이 보고 있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천재는 바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경이감이 우주의 원리를 알아내는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이슬비 내리는 이 시간 아침은 자연의 경이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의 색깔과 무게에 초록이 가려지고 먼 산을 뿌옇게 보이게 합니다. 몽환적일듯한 분위기의 이 느낌은 모두가 그렇게 느끼리라는 것은 착오일 수 있습니다. 오직 비를 반갑게 맞이하고 그로 인해 회색으로 변한 세상을 느끼는 자만이 눈치챌 수 있는 경이입니다. 경이로 느끼지 못하면 그저 우산 쓰기로 불편하고 신발 젖어 신경질만 나는 아침이 됩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은 그렇게 그저 그렇게 생겨났기에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그렇게 받아들일 때만 그 느낌과 감각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일 수 있으나 참으로 그런 것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도 내 의지로 생겨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순간 자연과 마주하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이 아침 매번 글을 쓰는 경이와 마주하고 손끝 하나하나 움직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하얀 화면에 검은색 움직임이 하나씩 더해감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대하는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알게 되면 바로 아인슈타인처럼 삶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천재의 어깨 위에 앉아 천재들이 개척해놓고 발견한 진리를 바라보는 행운을 맛보고 있습니다. 식어간 차 한잔의 한 모금까지도 경이로움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을, 눈에 보이는 '유니버설 랭귀지'로 수식으로 풀어내고 증명해내는 천재들의 용어가 바로 경이입니다. 조건을 한정 짓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를 도출해내지만 보편타당한 일반적 합리성을 확보하고 모든 자연현상에 적용되는 법칙을 이끌어 냅니다. 말과 언어로 표현하면 온갖 오해와 정의가 난무하겠지만 숫자와 방정식으로 표현해놓으면 어느 누구도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습니다. 숫자가 보여주고 방정식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찌 경이롭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연과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조차, 용어의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경이를 이해하고 만나기 쉽습니다. 이 용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향이 다르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석박사 논문을 쓸 때에도 서문에 이어 전개할 본론 앞에 개념 정의와 방향을 붙여 논문이 써 내려갈 윤곽의 기초를 쓰게 됩니다. 그래야 논문을 읽는 사람들이 용어의 혼돈 없이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 수많은 토론들과 대담을 보게 되지만 대부분 이 용어의 개념에 대한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의 말에만 집중하게 되므로 말꼬리 잡는 형태의 논쟁만 보게 되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물론 토론에 나왔다면 용어를 공유한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을 테고 토론 전에 사전 조율을 할 테지만 말입니다.


자연과학 논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은 자연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노력해서 패턴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과학 철학자의 주장과 "인간이라는 필터를 통해 자연을 보고 그 안에 있는 흐름의 법칙을 발견해 내는 것이 과학이다"라는 과학자의 주장은 같은 현상을 놓고 해석하고 접근하는 개념의 차이에서 오는 편차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두부의 속을 볼 수 있는가? 두부의 속을 보기 위해서는 두부를 잘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두부를 반으로 자르면 그 두부의 잘린 면은 속이 아니고 바깥입니다. 계속 칼질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두부의 속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로 보입니다.


바로 언어가 갖고 있는 논리의 오류입니다만 기승전결의 삼단논법으로 결론을 이어가면 마치 옳은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 언어의 유희를 뛰어넘어 진실을 봐야 하지만 진실이 언어를 통해 표현되어야 하는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자연의 현상을 기술하는 일은 이렇게도 어렵고 기기묘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국 공통어인 유니버설 랭귀지인 숫자와 기호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숫자와 기호는 "그렇게 두자"고 공동 합의한 용어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말이 다르기에 끼어들 수 있는 혼돈의 공간을 아예 없애버린 것입니다. 세상 누가 봐도 '1'은 '1'입니다. 그래야 혼동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1이고 한국에서도 1이며 심지어 화성에 가서도 숫자 1은 1입니다. 아니 과거 100년 전에도 1이었고 1,000전 전에도 1은 1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불변한다는 것입니다. 숫자는 시공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상대적이지도 않습니다. 숫자, 곧 상수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게 만들었고 원리를 원리답게 했고 원칙을 원칙답게 증명을 하는 절대지표가 되었습니다. 과학의 진실은 그래서 방정식을 통해 결국은 숫자로 표기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철학과 사고 논리를 숫자로 표현해내는 과학은 그래서 인류의 위대한 창조물입니다. 우주의 생성 원리와 운행 원리를 알아차려 신의 경지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신이 되어버린 인류는 그 숫자와 방정식을 어떻게 활용해나갈까요? 이제부턴 인문학의 범위로 다시 들어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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