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Nov 13. 2023

종교를 넘어선 한국인의 현실주의

세상 살면서 솔직하고 진솔하게 살면 잘 사는 것일까?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손해일까? 이득일까? 손해일 수 도 있고 이득일 수 도 있는데 어떤 쪽으로 더 가까울까? 솔직함에 대해 물어보자.


'솔직(率直 ; frank)하다'는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다"는 뜻이다. "바르고 곧다"라는 정직(正直 ; honest)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있는 그대로 드러나 보여주는 것이 솔직함이다. 여기에는 자기의 치부도 들어있다. 실수나 잘못, 과오들도 모두 잘한 일들과 동등하게 가감 없이 꺼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솔직함은 엄중하다.


솔직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꺼내놓고 드러내지 않으면 남들은 모를 수 있는 그런 사실을 굳이 까밝혀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보여주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게 비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솔직함을 보는 시각이 아닌가 한다.


솔직함의 근원은 상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상대가 그 진솔함에 신뢰를 보낼 때 성립하는 양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때론 솔직함이 독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한쪽은 솔직한데 다른 한쪽은 솔직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불균형에서 나온다. 솔직한 사람이 바보가 된다. 미주알고주알 다 까밝혀 버림으로써 상대가 나를 공격하고 이용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버린다.


어쩔 것인가? 솔직해야 하는가? 숨기고 거짓으로 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침묵으로 일관하여 묵은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까?


무게의 균형추를 어느 쪽에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실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사회의 시선이 달라지고 국가의 방향이 달라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거짓과 위선이 솔직함을 덮고 있는 형국인 듯하다. 그것이 우리의 수준이기에 그렇다. 사회의 흐름은 밈처럼 휩쓸고 있는 분위기에 편승하는데 그 바탕은 역시 나에게 유리한 것인지, 내 가족에는 문제가 없는 것인지 등등 내가 처한 위치에서 유리하게 작동하느냐 불리하게 작동하느냐가 기준이 된다. 


바로 현실주의에 물든 우리의 DNA 때문이다.

한국인 심성의 대부분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최적의 삶을 살고 싶은데 목표가 있다. 그것도 나와 연관된 것들과의 관계로 영역을 한정한다. 나하고 혈연이든 지연이든 학연이든 관련된 사람들 중에 나하고 관계를 잘 유지하고 서로 도움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존재한다. 내가 모르는 사람은 나와 전혀 관계없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행한 사건 중에 나만 아니면 되고 내 가족만 아니면 되고 내가 아는 사람만 아니면 된다는 심사가 팽배하다. 


이런 현실주의적 사고관은 한국을 세계의 모든 종교가 뒤섞여도 큰 분쟁이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게 만든 장점이 되기도 한다. 지금 국지전을 치르고 있는 중동만 해도 종교전쟁이나 다름없다. 유일신이 지배하는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서양에서는 종교적 타협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인의 종교는 불교나 기독교나 이슬람이 아니고 현실주의 종교다. 겉으로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느냐는 것은 그저 겉치레이자 허울일 뿐 한국의 종교는 기복신앙을 바탕에 깐 현실주의 종교가 우선이다. 종교가 가진 의례(儀禮 ; rituals)만 다를 뿐이다. 종교의 형태 이전에 현실주의적 사고가 바탕을 깔고 있었기에 한국인 특유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 현실주의적 사고는 경제 쪽으로 보면 폭발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당장 지금 잘 살아야 하는데 온갖 노력들이 집중된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다 오직 목표는 하나다. 잘살아보자다. 한국전쟁 이후 60-80년대 격동기를 겪어오면서 한국의 바탕을 유지했던 발전의 긍정적 힘으로 작동했다. 바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자유의지만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조건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찾은 탈출구가 현실주의 경제를 낳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실주의 앞에 솔직함은 사치에 가깝다.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잘 살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잘 되기 위해서는 선의의 거짓말이 더 효용성이 높다. 묻고 따지지 않는다. 내가 살고 내 주변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건 없이 뭉친다. 현실주의적 세계관의 끝판왕이다. 지역감정을 내세우고 혈연, 학연, 지연을 찾아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보려고 한다. 그래야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의 확률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가장 편안한 시기를 살고 있는 행운아들임에 틀림없다. 남북이 분단되어 긴장된 상태이고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동네북 신세일지언정, 그 와중에 세계에 존재를 드러내고 잘 살 수 있음을 보여준 민족이다.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현실주의로 극복하고 있던 바탕이 흔들리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부분은 살리고 역기능으로 추락하는 것은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균형추를 옮겨야 한다. 어렵고 힘든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쉽고 편한 쪽으로만 움직이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좀 더 공평하고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배려를 할 수 있는 쪽으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길이다. 솔직함이 드러나 신뢰가 쌓이고 상처를 보듬어 새 살이 나게 해야 한다. 잠시 발전의 속도를 늦추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함께 가야 한다. 그것이 세상사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술 인심, 담배 인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