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Nov 16. 2023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일이 전부다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항목 중에 기억력 감퇴와 강박증이 있다. 나이만큼 사용했을 테니 어딘가 고장이 나거나 부품이 빠졌거나 윤활유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삐그덕 거릴 테니 당연한 거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이 강박장애로 발전하여 병으로 취급된다.


요즘은 빈번하게 사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까운 지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같이 아는 사람들의 근황을 묻거나 대화의 주제로 누군가가 언급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상황을 설명하는 일화기억 속에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등장인물의 이름이 매칭되지 않는 현상을 종종 경험한다. 가끔은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좌절할 때가 많다. 이제 정말 나이 들었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식구들 휴대폰 전화번호를 까먹은 지 오래되었음은 물론이다. 전화번호가 휴대폰 속이 아닌, 수첩 속에 있을 때는 외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굳이 외우지 않아도 손가락 쉬프트만으로도, 아니 휴대폰에 대고 말로 해도 전화번호를 찾아주고 걸어주고 한다. 반복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으면 기능은 떨어지게 되고 종국에는 사라지게 되는 게 진화의 패턴이다. 생명의 큰 그림으로 보면 아주 합리적인 소멸의 단계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억력 떨어진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최면을 걸고 위안을 삼을 일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출퇴근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차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전시되어 있는 근대 유물로써의 기능을 주로 할 뿐이다. 자동차가 어쩌다 햇빛을 보는 때는 주말에 골프장 갈 때와 가족 전체가 움직여야 하는 때 정도다. 우리 집에서 아파트 다음으로 비싼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이용 효율성은 최저인 이상한 물건이다. 없으면 불편하고 있으면 요물단지 수준이다.


이 요물단지를 사용하는 횟수가 적다 보니 가끔은 지하 몇 층에 주차해 놨는지 헷갈려서 주차장을 아래위로 헤매고 다닐 때가 있다. 아무리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주차위치가 머릿속에서는 백지로 남아있는지 항상 궁금했다. 새벽 골프가 있어 캐디백과 보스턴백을 들고 주차장을 헤매고 있으면 기분이 참 처참해진다. 지하 주차장 한 층을 내려올 때마다 자동차 키의 경적소리를 눌러보고 아무 반응이 없으면 다음 층으로 내려가길 반복한다. 이러다 저녁에 집도 못 찾아올까 걱정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집까지 길을 안내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네비가 없는 자동차 운전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자동차 GPS 내비게이션이 활성화되기 전에는 골프장 지도책을 펼쳐 들고 찾아가곤 했었는데 말이다.

기억력이 이렇게 현저히 저하되다 보니 강박적 사고도 함께 따라오는 듯하다. 가끔 운전하고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엘리베이터 앞에 와서 승강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참 내가 자동차 문을 잠갔나?"라고 되묻는다. 차에서 내리면 자동 반응으로 문을 잠그고 할 텐데 문을 잠갔는지 아닌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불안해진다. 다시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가서 확인을 한다. "어라! 잠겨있는데" 그제야 안심을 하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온다. 


강박적 사고(obsession)는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이다. 내가 자동차 문을 잠그지 않았을 때 누군가 내 차 문을 열고 이것저것 가져가겠지라는 불안과 걱정이 기억력 감퇴 증상과 겹쳐 상승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강박적 사고는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강박적 행동(compulsion)으로 이어져 자동차로 다시 가보게 만든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어 나타나면 강박증이 되어 버리고, 불안과 걱정이 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강박장애 증상의 유형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이 '손 씻기'와 같이 '오염/세척 강박'이 대표적이고, 외출할 때 문은 잠겼는지, 가스 불은 껐는지, 댕댕이 밥은 챙겨놓고 나왔는지 등등을 의심하는 '확인 강박'이 있다.


이 같은 강박장애의 원인이 뇌의 흥분성 신경전달 물질인 '글루타메이트'와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감마 아마노부티르산(GABA)"의 불균형 때문으로,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 수치가 더 높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가 아니고 뇌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도 뇌 속에 있는 화학물질의 양의 정도차이가 빚어내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신경 억제성 GABA 물질을 만드는 곳이 우리가 먹은 음식물에서 에너지를 추출해 내는 9미터 정도의 내장에 기생하는 박테리아들이 음식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잘 먹어야 하는 이유다. 신경전달 물질의 균형을 맞추는 단서가 내장 속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기억력 문제, 강박관념의 문제 등등 모든 인체적 생각과 운동의 문제는 복합적 총합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문제가 모든 만병의 해결 방책이자 현대 의학이 다시 집중하는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너무 단순한 메커니즘의 흐름이기에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 그것으로 족하다. 잘 못 먹고 잘 못 싸고 잘 못 자면 그것은 움직임을 놓고 자연의 원소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너무도 간단한 순환 사이클일 뿐이다. 


내가 지금 고민하는 기억의 사라짐과 자동차 문 잠김의 불안조차도 그 안에 있음을 눈치채면 지금이라도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항상성(homeostasis)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 그것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잡시다.

작가의 이전글 연락 안 한 지 1년 이상되는 사람은 버려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