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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17. 2023

세상에 없는 세 가지를 있게 하라

나이가 들면서 계속해서 묻는 질문이 있다. '산다'는 것에 대한 정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지, 사는 게 무엇인지 등등 사춘기 때나 고민했을 법한 화두를 다시 들고 있는 것이다.


왜 다시 근원으로 돌아갈까?


바닥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다. 직장에서 퇴직할 연령대가 되어서 그런가 보다.  이런 생각의 사이클조차 '산다'는, '살고 있다'는, '살아내고 있다'는 범주 속에 주파수 피크 하나임을 눈치챈다.


참으로 희한하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무엇을 알기까지는 까막눈인 상태가 말이다. 있어도 모르고 지나쳐도 눈치채지 못하는 유령 같은 그 무엇, 신기루 같은 그것, 그것을 잡고 미래의 불안을 떨쳐내고 현실의 편안함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 끊임없는 사투의 과정이 삶이다.


어제저녁, 대학원 다닐 때 강좌 교수님을 모시는 작은 모임을 했다. 교수님께서 불쑥 "세상에 없는 세 가지가 있는데 정답이 없고 비밀이 없고 또 하나가 있는데 무엇일까요?"라고 물으셨다. 세상에 없는 것이 어디 세 가지 일뿐일까만은 정답이 아닌 해답에 가까운 은유의 멋을 가미하려면 반드시 하나의 정의가 등장해야 한다. '공짜가 없다'라고 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다. 세상 사는 일에 대한 물음의 답변이 정답과 비밀과 공짜에 들어있다.


세상사는 일에 정답이 없다는 것은 모든 일과 행위가 정답이라는 것이다. 경우의 수가 맞을 확률 분포만큼이나 다양한 크기와 개수의 존재들이니 만큼, 그만큼에 해당하는 정답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한 그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도 없다. 그 시간,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정답이 되지만 조금만 결이 틀려지고 시간이 달라지면 정답이 아닐 수 도 있다. 상대적 시각으로 모든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거시적 정답론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사는데 정답이 어디 있어? 그냥 사는 게 다 답이지"라고 흘려들을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정답이 없기에 정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전력투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원이자 비밀이다. 없는 정답을 찾고 만들고 꾸며나가는 과정이 호기심이고 창의성의 발현이다.


비밀이 없고 공짜가 없다는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정의이다. 관계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지켜야 하는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조심스러움이다. 진솔함과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음을 일상 용어로 드러낸 것이 비밀과 공짜라는 단어이다.

공부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분야가 인문학이라고 한다. 정답이 없기에 자칭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이 모두 정답인 양 난사되고 사람들의 귀를 홀린다. 인문학은 실험을 하여 증명하는 실증과학이 아니다. 가설을 세우고 이를 연역법 추론을 통해 확률 분포를 들이대고 표준편차가 어쩌고 해 봐야 과학적 기법을 도용한 변죽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인문학 논문의 결론을 읽어보면 "연구를 했더니 수집한 사례의 빈도수의 한계가 있어 제한된 결과가 도출되었다. 다른 학자들이 더 많은 사례로 연구하는 단초가 되었으면 좋겠다"정도의 문구가 들어있음을 보게 된다. 추출된 표본집단에서만 통용된 연구결과라는 소리다.


자연과학자는 자신이 주장한 연구결과가 다른 과학자들의 검증을 통해 다른 결과가 나오면 즉시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실험 결과를 재 검증하고 잘못되었음을 시인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결과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에는 이견의 소지가 없다. 실험결과와 숫자로써만 증명할 수 있기에 숫자가 다르면 학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인문학자들은 자신이 접근한 연구 방향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의 주장이기에 접근의 오류를 시인하는 순간, 출발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기에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인문학은 말로 하는 것이기에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맞게 기술되어 있다고 해서 논리가 증명이 될 수는 없다. 수포자 인문학자들의 고집이자 학문 발전을 역행하는 자기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에 정답과 비밀과 공짜가 없다면 찾아야 한다. 없다고 단정 지으면 없게 되지만 있을 수 도 있겠다고 정의하면 찾을 수 있다. 정답을 찾고 비밀을 캐고 공짜를 얻어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삶은 실패를 보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완벽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창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패의 부정적 의미에 함몰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실패가 있어야 가능하다.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배울 수 있는가? 기어 다니며 무릎의 힘을 키우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가? 물 먹지 않고 수영을 배울 수 있는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해 봐야 덜 아프기 위해, 안 넘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똑바로 가는 법을 체득하게 되고 코로 물이 들어와 캑캑거려 봐야 입으로 숨을 들이쉬는 기법을 알게 된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한치도 실수와 실패의 순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Tough times create strong man, strong man create easy times. Easy times create weak man, weak man create tough times. (힘든 시간은 강한 사람을 만들고 강한 사람은 쉬운 삶을 만들며, 쉬운 삶은 약한 사람을 만들고 약한 사람은 힘든 시간을 만든다)"


산다는 것은 현재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좀 더 나은 위치로 가기 위해 환경을 바꿔나가는 과정이다. 힘들다고 주저앉을 수 없다. 잠시 쉬었으면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정답에 가까운 해답을 귀띔해 주고 비밀을 지켜주고 공짜로 밥을 사주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서로에게 귀한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작은 차이가 보정이 안되면 비밀이 새어나가고 더치페이하고 엉뚱한 정답을 받게 된다. 세상사는 이치는 그렇게 사람 속에 있다. 그것을 산다고 한다. 참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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