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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09. 2024

삶의 결산 그래프

새해도 됐고 정년퇴직도 얼마 남지 않은 김에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탈탈 털어보자. 통장에는 잔고가 얼마나 남아 있으며 주식계좌에는 또 얼마나 마이너스 표시가 되어있는지, 분양받아 25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의 지금 시세는 얼마나 하는지, 연금보험 만기는 언제까지이고 만기 시에 수령하는 액수는 얼마나 되는지, 국민연금 받을 때까지 버틸 수 있는지, IRP에 넣어두고 내팽개쳐둔 퇴직연금은 얼마나 불었는지, 와이프 몰래 꼬불쳐둔 비상금은 또 얼마나 되는지까지 하나씩 적어볼 일이다.


그러다 문득 평생 살아온 인생을 돈의 액수로 환산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갑자기 초라해지고 이것밖에 안된다는 결과에 의기소침해진다. 삶의 궤적을 돈의 크기로 변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과, 평생을 같이 살아온 가족과 지인의 무게까지 돈의 액수에 녹아든 것일까? 이 상태가 맞는 것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위해 지금 여기까지 왔는지 다시 한번 묻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남은 인생 1/3을 잘 버틸 수 있을까 와 같은 쓸데없는 고민이 현실로 다가와 있음에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정년퇴직을 1-2년 앞둔 사람, 대부분이 해봤을 삶의 결산 모습이다.


결산을 해보는 이유는 뻔하다. 직업 없는 노년의 긴 시간을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근근이 라도 살 수 있는지를 판단해 보기 위해서다. 첫 번째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도 다시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고 언제까지 직업전선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판가름하는 일이다. 큰 병이라도 엄습해 왔을 때 병원비라도 잘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의 발로다.


노년의 삶의 질은 결국 돈으로 귀결되는 안타까움에 있다.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는 일상의 품격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달려있다. 천차만별의 범위일 수 있다. 역시 생각하기 나름이다. 최소한의 품위유지를 하고 산다면 많은 돈이 필요 없을 수 도 있다. 그나마 한 달에 책 대여섯 권 정도는 사서 읽고 두세 번 친구들하고 골프라도 치고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어느 정도 가용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할 것이다.


삶의 결산은 속물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동물적 근본 속성이기도 하지만 명확히 정해진 일은 딱 한 가지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죽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자명하여 묻지도 않지만 삶의 결산 그래프를 그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일지 모른다는 애매함이 욕망을 끌어오고 욕심을 낳게 한다. 돈에 집착하게 하고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피트니스센터로 가게 한다.


삶의 종착역에 대한 불확실성이 삶에 대한 집착을 끌고 오는 원동력이 된다. 아이러니이자 모순이다. 지금 당장 쓸 돈이 있어도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머뭇거리게 된다. 점점 나이 들면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질 텐데라는 근심으로 주머닛돈은 점점 곰팡이가 슬어간다. 자식 손주들 용돈주는 것도 손 떨리며 주게 된다.

하지만 삶의 중간결산을 하는 일은 돈을 제대로 잘 쓰기 위해서다. 통장에 있다고, 침대 밑에 깔고 있다고 내 돈인 줄 착각하면 안 된다. 내 돈은 내가 쓴 돈이 내 돈일뿐이다. 쓰지 않고 쓰지 못하면 내 돈이 아니다. 통장에 적힌 숫자에 흡족해해 봐야 소용없다. 내가 쓰지 않으면 남의 돈일뿐이다. 물론 쓸 돈의 액수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잘 쓰는 것일까?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해 써야 한다. 과감한 용단이 있어야 한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꽁꽁 꼬불쳐두는 습관을 떨쳐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지출을 하는 것이다. 앞으로 예상되는 남은 인생을 일 년 단위로 그래프로 그려놓고 그 해에 가용할 수 있는 지출의 액수까지 집에 넣어보면 매달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대략 알 수 있다. 그다음은 눈 딱 감고 그 액수만큼 매달 쓰는 것이다. 큰 그림 속에서 노는 법을 터득할 일이다. 일 년에 한두 차례 해외여행이라도 갈 계획이라면 나라와 여행일 수에 맞는 비용을 위해 다른 달에 조금 덜 쓰고 맞춰가면 된다.  


"내년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아껴 써야지"라고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절대 그 돈을 쓰지 못한다. 지를 수 있을 때 질러야 한다. 나이 들수록 결단이 빨라야 한다. 머뭇거리면 어떤 일이든 다가갈 수 없다. 하고 싶으면 그냥 나서야 한다. 맛집을 추천받으면 그냥 가서 먹어야 하고 안 가본 여행지가 있다면 당장 숙소를 예약하고 떠나야 한다. 풍족하지 않더라도 가용할 수 있는 돈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 리조트나 특급호텔이 아니더라도 에어비앤비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들더라도 일단 떠나서 만나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의 중간결산 그래프 바탕에는 건강관리가 깔려있음도 알아야 한다. 평생 일하다가 퇴직한 많은 선배들이 갑자기 큰 병을 치르는 경우를 여럿 보게 된다. 평생 간직하고 있던 긴장감이 풀려서 발생하는 현상일 수 있고 할 일이 없다는 자괴감의 스트레스 영향일 수 있다. 무엇이 되었든 당사자가 되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그 시간을 잘 극복하고 이겨내 건강 그래프의 하향곡선을 우상향으로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골골 백세는 필요 없다. 70-80대 요양원 생활은 더욱 소용없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니지 못하면 통장에 잔고 많아봐야 소용없다.


남은 인생을 어찌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자기를 위해 돈을 쓰고 건강을 유지하는 일이다. 너무도 현실주의적 속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지만 그것을 살아내고 버틴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똑같다. 아니 모든 동물은 다 똑같다. 그렇게 살아가고 살아내다, 자연으로 기꺼이 돌아가는 일이다. 나를 위해 품위 있게 살아보자. 그래야 요양원 침대에서 아무도 모르게 세상과 이별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보고 세상 살면서 참 행복했다고 즐거웠다고 사랑했다고 말하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는 일 참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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