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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26. 2024

필리핀 세부 탈출기

항공사에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의 첫마디가 "싸게, 여행 많이 다닐 수 있어 좋겠다!"다.


그렇긴 하다. 항공사직원들은 노선에 관계없이 세금 내고 보통 일반 항공료의 10% 정도만을 내면 된다. 다니는 항공사뿐만이 아니라 계약을 맺고 있는 대부분의 항공사를 이용해도 똑같이 적용된다. 직원들의 복지혜택으로는 최상이 아닐 수 없다.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분이 "직원들이 자동차 살 때 할인 혜택이 있긴 한데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정도"라고 할 정도로 항공사직원들의 항공기 이용 혜택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항공사마다 1년에 제공하는 항공권 사용 매수가 다르긴 하지만, 내가 다니는 항공사에서는 1년에 노선에 관계없이 35매의 국제선 항공권을 사용할 수 있다. 퇴직하고도 근속연수에 따라 최대 10년까지 항공권 8매를 사용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복지혜택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변수가 있다. 직원 항공권은 예약을 할 수 없다는 조건이 걸려있다. 공항에서 빈 좌석이 있어야 항공기를 탈 수 있는 '대기 항공권'이라는 소리다. 유상 승객이 모두 탑승하고도 빈 좌석이 있어야 그때서야 직원들의 대기 순서에 따라 탑승을 할 수 있다. 직원들의 대기 순서는 해당 항공편에 대기 예약을 먼저 하는데 우선순위가 있고 직급별로 상위 직급이 우선순위에 따르는 합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좌석 예약을 확정할 수 없다 보니 해외여행을 계획하는데 고려해야 할 사항이 여럿 생긴다. 특히 호텔과 현지 철도 등 교통수단 예약을 확정하고 예약을 해야 하는데 항공편 좌석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여행을 계획할 때는, 목적지를 보통 2-3군데 정도 정하고 한 달 정도 전부터 항공편 예약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예의주시하고 매일 체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출발 일주일 정도 남게 되면 예약이 더 찰 것인지, 조금 비어있는 현상태로 그냥 남을 것인지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출발 도착 항공편의 예약 상황을 동시에 주시해야 한다. 그런 다음 예약이 제일 비어있는 노선의 항공편에 대기 예약을 함과 동시에 그동안 검색해서 지켜본 호텔과 철도 예약 등에 들어간다. 호텔도 마지막까지 예약 취소를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예약을 한다. 가격이 조금 더 비싸지만 할 수 없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항공사 직원들의 해외여행은 사실 노심초사하며 다니는 것이 속성으로 숨어 있다. 그래서 휴가철이나 명절 등 황금연휴에는 직원 항공권 사용은 언감생심이다. 아예 포기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 떠났다가 원하는 날짜에 항공기를 못 타고 며칠 뒤에 타거나 다른 도시를 경유하여 돌아오거나 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나만 해도 그렇다. 지난주 필리핀 세부로 와이프와 여행을 다녀왔다. 세부도 원래 계획하던 여행지가 아니었음에도 항공편 예약률이 가장 낮아서 급히 가고자 했던 베트남 푸쿠옥에서 목적지 변경을 했던 곳이다. 출발 전에는 인천 출발 항공편 좌석 예약이 비즈니스석 및 일반석 예약이 절반도 안되어 있어서 안심이 되었고 주말에 돌아오는 항공편에도 비스니스석은 꽉 차 있었지만 일반석은 그래서 10여 석 남아 있었다. 보통 여행 일정들이 정해져 있어 출발 일주일 전 예약상황이 그대로 유지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세부로 가는 날 오전 예약상황을 다시 체크하는 순간, 변수가 발생했다. 가는 편의 예약상황은 절반이 비어있는 그대로인데 돌아오는 날 항공편 예약상황이 만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도 될까 망설이다가, 어차피 리조트랑 예약을 이미 해놓은 상황이라 출발해 보기로 하고 떠났다. 세부에 있는 내내 돌아오는 항공편 예약상황이 걸려 불안했다. 하루에 한 번씩 휴대폰으로 회사 인트라넷에 접속하여 예약상황에 변화가 있는지 확인한다. 이미 만석이 되어 있는 예약율이 오는 날까지 변화가 없다. 불안을 넘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못 탈 것에 대한 대안을 빨리 강구해야 한다. 출발 하루 전 다른 항공사 좌석 예약을 시도한다. 일단 공항에 나가 대기를 했다가 못 탈 경우 다른 항공사라도 돈 내고 타야 한다. 그런데 다른 저가 항공사들도 모두 좌석이 만석이다. 설날 연휴도 2주일이나 지났는데 이렇게 한국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하루에 9편의 항공기가 쏟아져 들어오는데?


일단 오고자 하는 날짜에 다른 모든 항공편의 좌석상황이 만석이다. 폭풍검색을 하다 보니 다음날 출발하는 진에어 항공편에 일반석 2석이 빈다. 그나마 누군가 취소를 한 모양이다. 급히 좌석 예약을 한다. 근데 항공료가 장난이 아니다. 편도임에도 1인당 695,900원이다. 세부로 올 때는 비즈니스석을 왕복으로 1인당 133,000원에 왔는데 할 수 없다. 일단 울며 겨자 먹기로 1,391,800원을 결재한다. 다행히 대기했던 항공편에 빈 좌석이 생겨 타게 된다면 환불 수수료를 60달러 내는 것으로 하고 그마저 안돼서 못 타면 하루 더 세부에 머물다 비싼 항공료 지불하고서라도 서울로 가는 비싼 저가항공사를 타야 하는 숙명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안으로 진에어가 계열 항공사인지라 직원대기 항공권 사용도 가능하고 출발시간도 2시간 뒤에 있는 관계로 진에어에도 직원대기 항공권을 끊어서 대기해 보기로 한다. 돈은 들지만 할 수 없다. 그나마 직원항공권은 취소수수료가 없어서 다행이다. 발권해 놓고 대한항공을 못 타면 진에어도 대기해 보기로 한다.


문제는 또 있다. 비행기를 못 타면 하루 더 있어야 하는데 숙박이 문제다. 공항에서 날밤 새고 마냥 기다릴 수 도 없다. 공항 근처의 호텔을 검색하고 0.5박을 할 수 있는 스파도 알아본다. 호텔은 새벽 2-3시에 체크인을 해야는데 서너 시간 자자고 예약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다행히 한국서 세부로 오는 항공편들이 모두 밤비행기들이라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마시지를 하고 0.5박을 할 수 있는 스파들이 여럿 있고 공항에서 픽업까지 해준다. 그중 한 곳에 공항 픽업도 가능한지 문의하고 혹시 비행기 못 타면 연락하겠다고 확인까지 해 놓는다. 일단 비행기를 못 타더라도 하루 더 버틸 준비를 마쳤다. 심적으로 조금 안심이 됐다.


사실 혼자 여행하면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운신의 폭이 넓을 수 있어 비행기 못 타면 나름 대처가 용이하나 가족이 동행하고 있으면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노심초사, 불안한 마음으로 세부공항에 항공기 출발 2시간 반 전에 도착하여 카운터 대기를 한다. 역시나 카운터 마감시간이 임박해 오는데도 카운터 직원의 호출이 없다. 카운터 전광판 불빛이 하나 둘 꺼져가는 것을 보는 눈길은 점점 초조해진다. 그렇게 탑승 카운터 마감시간이 됐다. 카운터 직원이 부른다. 다행히 비즈니스석 1 석, 일반석 1석이 노쇼 승객으로 비었다고, 좌석은 떨어져 있으나 타고 갈 수는 있겠다고 한다. 비즈니스석, 일반석을 가릴 형편이 아니다. 일단 탑승권을 받아 들고 탑승구로 달려간다.


우여곡절 끝에 항공기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혹시 몰라 예약했던 저가항공사 항공편을 급히 취소했다. 환불수수료 60달러를 기꺼이 지불했다. 0.5박 스파도 양해를 구하고 취소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그렇게 필리핀 세부를 탈출했다. 호핑투어의 맑은 바닷속 산호초도 가물가물하고 전용비치가 있는 리조트의 한적했던 하루의 따분함도 먼 기억 속으로 숨어들었다.


노심초사한 탈출기를 몇몇 지인들에게 알렸더니 "그래도 그게 행복하고 좋다. 부럽다"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이렇게 다니다 보면 내 돈 내고 예약하고 편안히 다니는 게 최고라는 생각도 든다. 30년 넘는 항공사 생활로 여행을 수없이 다니면서 이렇게 쫄리며 여행을 해 본 경험도 흔치 않다. 큰 비용 안 쓰고 돌아온 게 다행이다. 이렇게 아침글로 마주할 수 있어 더 다행이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수많은 변수들이 모여서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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