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여행은 '기억나지 않는 여행'이다

by Lohengrin

최악의 여행은 '기억나지 않는 여행'이다. 여행을 다녀왔는데 뭘 먹었는지, 무엇을 봤는지, 무엇을 했는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참 비참할 것이다.


가볍게 지난 긴 추석 연휴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면 한번 기억을 떠올려보라. 무엇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가? 여행 첫날 무엇을 타고 어디로 가서 무얼 먹었는지, 같이 간 동행자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리조트 수영장 물은 차가웠는지, 비키니 입고 선배드에 누워있던 선남선녀는 유럽에서 왔는지, 일본에서 왔는지, 눈인사에 어쭙잖은 '하이!'로 인사를 건넨 벨맨은 모자를 썼는지 등등 줄줄이 떠오르는가?


그나마 추석 연휴에 여행을 다녀왔다면 당장 3-4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 흔적이 남아있어 여행에 대한 줄거리들이 남아 있을 터다. 그러나 시계를 조금 더 뒤로 돌려 지난봄에 갔던 여행지의 기억을 꺼내보라. 떠오르는 것이 있는가? 아마 "지난봄에 어디를 갔었지?"라고 되묻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필리핀 세부에 갔었는데 어느 리조트에 묵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리조트 수영장에서 수영했던 거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정도일 것이다.


여행은 "시간을 돈으로 사서 가는 것"이라 했다. 시간을 내고 그것도 돈을 어느 정도 쓸 것을 각오하고 다녀왔을 것이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난다고? 이런 비효율적인 여행을 해왔다고? 기억에도 안 남고 돈과 시간을 낭비한 여행을 왜 했던 것이지?

남들에게 '나 거기 갔다 왔어" "가보니 좋데" 정도의 단말마를 질러 자랑하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멋진 해변 사진과 열대과일 주스 사진을 올리고, 유럽의 멋들어진 도시전경 동영상 짤을 올려 과시해야 그나마 남들에게 "나도 이 정도는 하고 있어! 부럽지" 정도의 포장재로 위장하고 과시하는 얄팍한 수준의 심사가 발동해서일까?


"좋고 멋진 곳으로의 여행을 통해 '스트레스 해소'하고 왔으면 됐지, 기억에 남는지 안 남는지가 뭐가 중요해?"라고 반문하면 뭐 할 말이 없긴 하다. 그냥 잘 놀고 잘 갔다 왔으니 기억이 안 날 수 있다. 오히려 기억이 안나는 것이 정말 잘 다녀온 여행일 수 있다.


하지만 시계를 되돌려보자. 정말 '기억나지 않는 여행'이 있다면 두 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여행 준비를 내가 스스로 하지 않았을 경우와 정말 여행기간 내내 아무 일도 없이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관광지 몇 곳 돌아다니다 왔을 때다. 호텔과 리조트를 예약하느라 며칠간 온갖 글로벌 플랫폼을 비교하고 고르고 골라서 예약하고 다녀왔다면 객실 곳곳, 리조트 뷔페 메뉴 하나하나, 열대과일 종류 색깔까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공항에서 시내 호텔까지 가는데 전철 방향을 거꾸로 탈까 봐 노심초사 열차 안내판을 뚫어져라 지켜봤다면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 다녔는지 생생히 기억날 것이며 전용해변에서 빌려 탄 서핑보드가 뒤집혀 바닷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컥컥거려봐야 짠 소금물이 기억 속에 알알이 박혀 있을 것이다.


여행은 경험을 풍부히 쌓는 가장 좋은 방편이다. 물론 여행을 하는 목적에 따라 경험의 축적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쉬러 가느냐 먹으러 가느냐 보러 가느냐 아님 이들 목적을 조합해서 가느냐에 따라 여행의 경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바로 인과구조 예측을 경험(經驗 ; experience)이라 한다.


인간은 경험한 것만을 의식적으로 기억에 담는다. 그것도 평범한 경험이 아닌 아주 돌발적이고 기상천외한 경험일수록 기억에 저장을 한다. 바로 생존본능의 발현이다. 새로운 것, 처음 보는 것 등은 인과구조를 연결하여 예측하는 것에 상당한 에너지가 든다. 어떻게 작동하여 나의 생존에 지장을 줄 것인지 아닌지를 예측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그래서 주목을 하고 집중적으로 관찰을 하여 생존에 위협을 주지 않음을 판단하게 한다. 이러한 경험이 바로 생존의 확률을 높이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겪어봤기에 다음에 비슷한 사례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무 기억이 없다? 고 하면 새로운 경험을 거의 안 했다는 것과 같다. 그저 그런 먹거리, 서울에서는 못 먹어봤던 음식을 먹어본 정도로는 기억을 자극하기에는 부족하다. 그저 그런 자연 풍광이나 다소 이색적인 거리의 모습 정도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자주 다니면 다닐수록 감동이 사라지고 감흥도 사그라든다. 좋다는 것을 봐도 그 정도 가지고로 폄하하게 된다. 여행도 중독이기에 그렇다. 눈높이에 대한 중독이다. 남들 안 가본 곳으로 여행지를 찾아 나서는 이유다.


여행 경험의 중독은 이처럼 역치(閾値 ; threshold)를 높인다. 경험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는 본능이다. 여행의 경험 기억은 세상의 끝인 오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생고생해서 기억에 많이 남을 수도 있지만 도심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를 자료를 찾고 수집하고 정리하면 그러는 동안 기억의 경험들이 쌓이게 된다. 여행은 경험을 기억으로 각인하는 일도 되지만 기억을 확인해서 경험으로 만드는 일도 된다.


문득 떠오르는 여행의 편린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속에 있는 내 모습? 그랜드캐년의 장엄한 퇴적층에 반사되어 온 아침햇살에 울컥하던 내 모습? 아람브라 궁전의 헤네레페 정원을 걸어가는 내 모습? 고흐미술관 해바라기 그림 앞에서 넋 놓고 있는 내 모습?


어떤 경험이 내 모습을 만들고 있는가? 그나마 몇 개라도 기억에 되살아나는 경험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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