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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이 되었다 - 정년퇴직 백서 3

남은 숫자를 세는 이유

by Lohengrin

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냈으니 실제적으로는 이번 달이 마지막 근무다. 누구에게나 올 시한부 직장생활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場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場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써보자.



정년퇴직 카운트다운 - 4일 남았다.


숫자를 센다는 것이 의미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숫자를 세고 있다. 나흘 남았다고 말이다. 왜 그럴까?


숫자를 세면 '마디'가 생긴다. 앞뒤가 명확해진다. 숫자는 바로 지금을 드러내고 확인하는 금 긋기다. 금을 긋고 마디를 만드는 이유는 재확인하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이자 의식의 최전선이다. 자신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기 위한 방편이다. '미토콘드리아' '산소'의 저자인 닉 레인(Nick Lane)이 최근 발간한 책 '트랜스포머'를 통해 의식도 물질임을 설파했다. 마취제라는 물질을 투여하여 몇 시간씩 의식이 없는 상태를 만들 수 있다. 화학물질에 의해 의식이 조절될 수 있다면 의식도 물질이라는 논리다. 참으로 그러하다. 숫자 또한 의식의 마취제이자 각성제인 것이다.


'마디'는 키를 크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중간 버팀목이다. 대나무가 큰 키로 자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마디'때문이다. '마디'가 없다면 대나무는 바람에 꺾이고 휘어지는 보통 나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군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내가 지금 세고 있는 숫자 - 4 가 주는 의미는 어떤 '마디'로 작동하는가?


추억의 소환이자 정리이며, 회초리다.


한 회사에서 직장생활 35년의 마침표를 찍기까지 지나왔던 수많은 곡절의 사연들을 떠올리고 잔잔히 미소를 뗘보는 것이다. "잘 버티고 지금까지 왔구나" "참 많기도 했던 질곡의 시간들을 건너오느라 고생했음에도 쩔뚝거리지 않고 지팡이 짚지 않고도 여기까지 왔구나"에 대한 위안이자 다독임이다. 갑자기 닥쳐올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격려일터다.


앞으로 전개될 숫자의 의미보다 뒤에 있었던 숫자의 의미가 강하게 지배한다. 당연하다. 미래의 숫자는 알 수 없는 미궁이지만 지나온 숫자는 확연히 발가벗고 서있는 존재 자체이기에 언제든 소환되어 무용담으로, 치부거리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를 세는 더 명확한 이유는 뒤에 미련을 두기보다 앞으로 가기 위함이다. 숫자를 세는데 뒤로 세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물의 증감을 보여주는 상태일 때 수준에서나 빼기의 숫자가 등장하나 인간 군상의 세계는 더하기가 차지하고 있는 세상이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측하고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더하기의 숫자다. 숫자가 곧 삶의 마디 역할을 한다.


한편, 남은 숫자를 세는 또 다른 이유는 반성이자 경계다. "지금까지 뭐 했는데?"를 지적하는 감시창이자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를 묻는 질문창이다. 지나온 숫자를 묻고 앞으로 쓸 숫자를 소환하는 것이다. 미래를 설계하고 어떻게 갈 것인지를 계획하게 하는 감독관이다.


"퇴직하고 뭐 할 건지 구체적 계획이 있는가?" "어디 다른 직장에 취업이라도 예정되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니요"라는 답변뿐이고 "아직 계획된 일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초라한 변명만 남아있다. 그렇다고 의기소침해지지는 않는다. 그냥 담담하다. 나름 닥칠 일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밑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당장 '먹고살 걱정, 경제적으로 버틸 걱정, 매일 같이 닥쳐올 무기력함을 떨쳐낼 수 있는 일상의 스케줄 짜기' 등등에 대한 초안이 작성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일단 놀아볼 계획이다. 노는 것도 계획을 짜서 놀아야 한다. 빈둥빈둥 집안에 처박혀 있는 것이 노는 게 아니다. '목표가 있고 의미가 있는 노는 방법'을 찾아 실행해야 한다. 하루의 스케줄을 다시 짜야한다. 더 촘촘한 시간의 그물망을 펼쳐야 한다. 노는 것이 게으름으로 치환되면 한 방에 팍싹 늙고 꼬리꼬리해지는 꼰대의 전형이 되어간다.


'시간의 마디'를 계속 점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시간으로 마디를 만들어가야 한다. 조급할 필요 없다. 이제 가진 건 시간뿐이기에 그렇다. 그것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나태하게 쓸 수 있을지 몰라 경계하고 신독 해야 하는 그런 시간말이다. 나에겐 다가올 그 시간들이 쉬어가는 '여유의 마디'로 작동하게 만들 자신감으로 무장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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