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을 정리하며
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냈으니 실제적으로는 이번 달이 마지막 근무다. 누구에게나 올 시한부 직장생활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場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場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써보자.
정년퇴직 카운트다운 - 5일 남았다.
사무실 책상 주변정리에 들어간 지 이틀째다. 주변정리랄께 뻔하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집기류를 버리고 서랍을 열어 케케묵은 서류와 잡동사니 사무용품들을 하나 둘 버리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은 사무기기들이 디지털화된 이후로 별로 치울 것이 없다. 마지막 날 컴퓨터 부팅만 초기화하면 된다. 아니 요즘은 그럴 필요도 없다. 퇴직 바로 다음날 아예 컴퓨터 부팅이 안된다. 회사 이메일도 자동 차단이다. 회사에서 퇴직자들에게만 열어주는 별도의 사이트만 접속이 가능하다. 그 사이트 메뉴에는 회사 직원들의 경조사 알림과 퇴직 후 개인 복지로 사용할 수 있는 혜택들만 보여준다. 책상 위 컴퓨터는 그냥 놔두어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 사진이나 자료들은 아예 회사 컴퓨터에 저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첫 화면에 화면복사되어 있는 몇몇 사진만 삭제시키면 컴퓨터 재부팅 작업은 끝. 이것은 다음 주 마지막 날 시행하면 된다.
나는 책상 주변에 개인용 서랍장 3개를 쓴다. 책상 앞쪽에 하나, 책상 밑에 하나, 그리고 책상 뒤쪽에 하나다. 책상 아래쪽에 있는 서랍장은 3단으로 맨 위칸은 당장 쓸 수 있는 사무용품들이 놓여 있다. 칼, 볼펜, 만년필 잉크, 스테이플러, 스카치테이프, 메모지, 명함, 은행통장, 굴러다니던 10원짜리 옛날 동전도 한 움큼 있다.
서랍 두 번째 칸은 근래에 오고 간 메일 중 프린트되어 있는 것들과 반복해서 보고 확인해야 하는 데이터 프린트물이 놓여있다. 세 번째 칸은 개인용 세면도구, 화장품, 향수, 그리고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를 몇몇 아이템조차도 구석에 처박혀 있다. 책상 앞쪽에 있는 미닫이문의 2단형 서류함에는 3년 전 발간한 에세이집 '나는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책이 놓여있다. 이번주 차를 가지고 출근하여 모두 싣고 집으로 가져갈 예정이다. 그래봐야 몇 권 안 남았다. 에세이집 출간한 이후로 사람 만나면 명함 주듯 사인해서 주곤 했다. 그래도 2쇄를 찍었던 책인데 ---
책상 뒤쪽에 놓인 서류함에는 종이로 업무 보고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만들어진 서류 중에서 나름 중요도가 있는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 뒤쪽 서류함까지는 손을 못 댔다. 오늘 오후에 하나씩 꺼내 모두 파쇄처리할 예정이다. 중요한 사건의 근거자료가 될 수 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거라 폐기처분하는 게 맞다. 그게 35년 이 직장에서 근무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하나씩 꺼내 들춰보면 아무것도 아닌 내용들이 대부분일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세상은 그만큼 변했다. 서류함 넣어진 이래 거의 꺼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를 반증한다.
책상밑 서랍장을 정리하면서 하나씩 쓰레기통에 버리다 보니 그래도 물건 하나하나마다 서랍으로 들어오게 된 사연들이 다 떠오른다.
그중에 35년을 장승처럼 서랍 안을 지킨 물건도 있다. 바로 도장이다. 아마 요즘 나이 40대 이전 사람들은 도장이 뭔지도 모를지 모른다. 사무실이 컴퓨터 디지털화되면서 종이 서류 보고가 사라지고 이메일로 문서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어 서류에 도장을 찍을 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은 정말 중요한 계약서를 쓸 때 각 페이지마다 회사 관인을 날인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개인적 도장을 사용하는 경우는 전무해졌다. 도장을 찍을 자리를 손이나 전자펜으로 쓰는 싸인이 차지하고 있다. 내 서랍에도 서류를 기안할 때 쓰던 막대형 도장과 인주가 남아있다. 그리고 인주 사용하는 것이 불편해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종이에 찍으면 도장이 찍히는 것도 2개나 있다. 한때 유행해서 일본에 출장 가면 이 도장에 이름을 새겨 선물하기도 했다. 이 도장은 반자동형식이나 마찬가지인데 빨간 잉크가 도장 안에 내장되어 있다. 한자이름을 기계식으로 첨자 하여 만드는 것이라 인감도장용으로는 관청에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사무실에서 사용하기에는 아주 편했다. 그러던 도장들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서랍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장에 이어 서랍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부서 직원들과 찍은 사진들이다. 예전에는 부서 야유회들을 1년에 한두 차례는 간 듯하다. 요즘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들이다. 주말에 등산을 같이 간다고? 족구장이 있는 유원지 식당을 빌려 온 가족들을 동반해서 모인다고? 요즘 같으면 직원들의 원성이 자자했을 그런 모습일터다.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지금 서랍에 남아있는 사진 중 제일 오래된 것은 아마 95년 정도 때 일영으로 온 직원 가족들이 모여 야유회를 갔을 때 사진이다. 우리집 큰애가 2살 때라 낯을 가려 울고 해서 와이프가 전전긍긍했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30년도 더 된 사진이라 이미 그 사진 속 사람 중에서는 세상을 달리 한 얼굴도 4명이나 보인다. 사진은 시간을 평면에 박제하는 도구다. 그렇게 세월을 지나왔다.
또 하나 서랍 속에 숨겨져 있던 품목 하나가 유난히 많이 있어서 새삼 놀랐다. 품목별로 제일 많은 것은 필기도구일 테지만 그중에 예외적으로 칫솔과 치약세트가 담긴 파우치가 무려 대여섯 개가 넘게 나온다. 하나만 있으면 점심에 식사하고 양치하는 도구로 쓰고, 다 쓰면 버리고 또 사서 쓰면 될 텐데 이렇게 많은 양치용 파우치가 서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은 다소 의아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세면도구가 그렇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야근도 많았다는 증거다. 그것도 대충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개기다가 가는 정도가 아니고 밤 12시가 넘어까지 사무실을 지킬 일 들이 제법 많았다는 증거품이다. 35년 동안의 온갖 사건사고들, 그중에서도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졸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참 많이도 헤치고 지나왔다. 치약, 칫솔 파우치는 그렇게 그 현장의 도구들이었던 것이다.
서랍 속 물품 중 칼이나 스테이플러 같은 재사용이 가능한 것들은 부서 사무용품 사물함으로 옮겼다.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통으로 버려 사랍장을 깨끗하게 비웠다. 빈 서랍을 내려다보니 마음도 가벼워졌다. 이렇게 비운다. 버리면 버려지는 것을 그동안 계속 담아놨다. 서랍도 무거운 짐을 덜어 경쾌해진 듯 보인다. 이렇게 비우면 가벼워진다.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