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
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냈으니 실제적으로는 이번 달이 마지막 근무다. 누구에게나 올 시한부 직장생활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場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場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써보자.
드디어 현 직장에서 공식적인 회사 출근 마지막 날이다. 속으로는 "아직도 나에게는 10월 한 달이 남았다"라고 외치지만 말이다.
월요일이자, 지금 직장에서의 마지막 출근이라 그런지 아침 5시에 눈이 떠졌다. 35년을 아침 5시 반에 일어났는데 긴장하긴 한 모양이다. 설레서 그런가? 분 단위로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설레었다가 약간 침울했다가의 반복이다. 딱히 지금 심정이 어때라고 묻는다면 그 순간에 따라 두 가지의 답변이 나올 것 같다. 이랬다 저랬다.
마지막 출근준비를 한다. 어제와 다름없이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쳐다본다. 추분도 지나서 그런지 해가 많이 짧아졌다. 하늘엔 아직도 별들이 보이고 건너편 아파트 동에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고르면서 무얼 입을까 잠시 망설인다. 회사가 출근복장 자유화가 된 지 5년도 넘은 듯하다. 매일 특별한 회의나 행사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청바지에 폴라 티 정도를 매칭하고 백팩을 메고 출근을 한다.
그래도 오늘은 마지막 출근인데 청바지 차림은 아닌 듯하다. 한 동안 안 입던 감청색 정장과 흰색 셔츠를 꺼낸다. 예전에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정장과 넥타인데 ---
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치고 넥타이도 맬까 하다가 넥타이는 내려놓는다. 그렇게까지야 ---
그리고 가볍게 바이레도 향수를 칙~칙~ 뿌리고 아침 출근 준비를 마무리한다. 백팩 대신 브리프케이스 가방을 손에 든다. 신발장 안쪽에 넣어두었던 구두도 꺼내고 솔질도 한다. 현관에 붙은 거울 앞에서 차려자세로 마지막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현관문을 연다.
6시 15분. 예전과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 전철역을 향한다.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전철역을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종종걸음이다. 전철이 플랫폼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바삐 움직인다. 나도 어제까지는 그랬지. 오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아침 바삐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도 행복임을 눈치채게 된다. 이 시간에 나서지 않아도 또 다른 시간의 자유가 있음도 눈치채면 좋으련만 지금은 바삐 가는 사람이 더 행복하고 좋아 보인다.
사무실 책상은 지난주 모두 정리했다. 책상 위에는 랩탑 컴퓨터와 모니터 2개, 전화기 그리고 오늘 근무 중에 쓸 워터맨 만년필 한 자루만 달랑 남겨졌다. 만년필은 25년째 책상 위를 지키던 파수꾼이었는데 오늘 이후부터는 양복 윗주머니로 위치를 바꿀 것이다.
책상 주변의 서랍장들도 지난주 모두 정리했다. 종이로 파일 돼있던 것들은 미련 없이 파쇄해 버렸다. 나름 중요한 문건이니 35년 동안 버리지 못하고 넣어두었을 것이나 그 중요도의 미련은 철저히 개인적 가치에 의한 것 일터이다. 가치의 의미는 시간이 쌓이면 변하는 것이고 가끔은 묻어두어야 할 것들도 숨어있을 것이니 버리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다. 서류를 파쇄하면서 종이 한 장 한 장에서 풍겨오는 종이냄새 속에 사연도 함께 스멀스멀 떠오른다. 참 많은 사연들이 되살아난다. 좋았던 사연보다는 힘들고 어쩌지 못하고 당황하던 사연들이 더 많다. 서류 파쇄와 함께 같이 버렸다.
아직 10월 한 달이라는 조직의 보호막 속에 있을 테지만 10월은 보호막이었던 외피를 벗고 온몸으로 외부 생태계에 들어서보는 연습을 할 것이다. 사실 이미 코로나 팬데믹 시절, 한 달 근무하고 한 달 쉬던 패턴을 경험해 본 지라, 논다, 쉰다는 현상이 어떤 심리적, 경제적, 환경적 쇼크를 가져올 것인지는 대충 예상을 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한 달 후면 복귀한다는 전제가 있었음에도 닥쳐오는 무력감과 좌절감의 심리적 불안은 상당했다. 쉰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예방백신을 이미 맞아봤기에 지금 초읽기를 하고 있는 정년퇴직이라는 정해진 행보를 가는 데에는 불안이 조금 덜 하다 싶기도 한데 백신은 항상 유효기간이 있는가 보다. 당하고 닥치면 항상 새로운 바이러스가 된다. 불안 심리라는 게 항상 그런 듯하다.
지금 이 글도 사무실에서 쓰는 마지막 글일터다. 10월에도 여행을 가는 일정과 주말 이외에는 글쓰기가 계속되겠지만 다른 환경에서 다른 느낌의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나름대로 참 잘 살았다. 좋은 직장의 두터운 보호막 그늘 속에서 천수를 누리고 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이 조직에 어떤 좋은 역할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미안한 감도 없지 않지만 그런 부족한 개인을 정년이 되도록 끌어안고 지켜준 회사에 감사할 따름이다. 남들 다 아는 정말 어려웠던 시절, 버텨내고 자리 지켜온 보상이지 싶다. 35년 동안 여기서 가정을 이루고 큰 아이를 결혼시켰다. 그리고 직장인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정년퇴직의 마지막날까지 왔다. 직장인으로서 더 이상 행복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행복했다. 지나온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앞으로 올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을 더욱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