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냈다. 누구에게나 올 시한부 직장생활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場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場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
시간으로부터의 자유.
10월 한 달간 휴가를 내고 백수를 자처한 지 나흘째다. 지난 3일간은 경주와 안동, 영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회사도 샌드위치데이인지라 전사적으로 연차휴가로 쉬었으니, 공식적인 한 달 휴가는 오늘부터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라는 묘한 자유가 주는 설렘은, 갈 곳이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자유다. 갈 곳이 없는 사람에게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닌 구속이자 허무함이다. 휴대폰에서 아침 5시 반 알람을 10월 1일부로 지웠다. 직장생활 35년 동안 자동으로 입력되어 있어, 평일이면 눈을 뜨든 말든 음악소리로 시간을 알려줬었는데--- 반드시 일어나 출근하지 않아도, 지각을 걱정하며 전철역으로 뛰어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알람소리의 구속을 갈망하고 있다. 인간의 간사함이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하고 있음을 밑바닥까지 보고 있는 듯하다.
5시 반. 인생 절반 넘게 이 시간에 맞춰진 삶이었다. 정년퇴직 한다고 하루아침에 잊힐 시간이 아니다. 오늘 아침 눈을 뜬 시간은 5시 32분이다. 눈을 뜨고 울리지도 않는 휴대폰을 들어 확인한 화면의 숫자다. 어쩔 수 없다보다. 이놈의 습관이라는 것이 말이다.
아직은 휴가 중인 시간이라 회사 이메일 계정에 업무 관련 문서들이 그대로 들어온다. 아침에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확인하던 이메일들이다. 오늘 아침은 그냥 제목만 보고 넘겨버린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이젠 무시해야 할 시간이다. 사실 제목만 읽어도 대충 무슨 내용의 문서들인지 때려잡을 수 있다. 하지만 들여다보지 않아야 함도 동시에 깨닫는다. 아무 의미가 없음을, 그리고 그저 미련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말이다.
5시 반에 눈이 떠졌는데 그냥 이불속에서 망상에 빠져있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허무한 것 같다.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대충의 그림들은 있지만 막상 다가오니 이 또한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무조건 무엇이든지 행동하고 움직여야 한다.
평상시와 같이 침구류를 정리하고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나만의 아침시간을 위해 준비를 한다. 안방에서 데스크톱 컴퓨터가 있는 서재로 출근하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말이 서재지 막내 녀석의 방이다. 막내 녀석이 이번 학기에 시카고로 어학연수를 가면서 빈방이 되어있는데 연말까지 나의 서재로 재활용할 예정이다. 큰 아이가 쓰던 방은 와이프가 선점해 버려 빼앗긴 지 오래다. 집안에 와이프랑 각각의 공간을 나눠가졌다. 크지 않은 집이지만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듯하다. 더구나 와이프는 아직 3년을 더 학교에 출근할 수 있으니 낮에는 온통 나만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낮에는 나만의 천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공상을 해본다. 청소도 해야 하고 제법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을 테지만 말이다.
책상에 앉아 오늘 예정되어 있는 스케줄을 체크한다. 크게는 치과에 스케일링하러 가는 일정과 저녁식사 약속이 잡혀있다. 아침 8시 정도면 출근할 와이프를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주는 일을 하기로 한다. 백수가 이런 거라도 하며 시간을 때워야지. 퇴근 때 모시러 가는 것까지는 아니다. 와이프도 자기의 시간이 있을 테니 퇴근까지 데리러 가는 것은 오버하는 것이 틀림없다. 일단 이렇게 자처한 백수의 하루를 시작하기로 한다.
아침 글 쓰는 습관은 거의 20년 가까이 해온 패턴이다. 하루의 루틴을 시작하는 도화선으로 계속 작동할 것이다. 이렇게 도전을 시작한다. 시간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