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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리 Oct 15. 2021

오징어 게임의 세계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눈

빨간 나라, 파란 나라 어느샌가 모두들 주식을 하고 있다. 부동산은 이미 가진 자들이 더 높이 쌓아 올린 성곽, 그곳은 이미 충분히 높아서 입구 자체를 찾기가 어렵다. 진입하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 법적으로 내 미래를 저당 잡힌다는 부담이 있다. 현대판 노예제도랄까. 내 몸과 우리 가족들 뉘일 그럴싸한 집 한 채 가져보겠다고 노동과 자본에 얽매이는 것.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 어른들의 세상은 온갖 책임과 명세서, 지리한 일상의 반복으로부터의 진흙싸움을 하고 있다. 주식 투자는 그런 조직적인 얽매임이 없다. 오직 개인 혹은 투자자의 영광과 나락이 있을 뿐.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주식시장에도 있겠지만 흡사 논문 같이 긴 투자 약관의 개미 손톱만 한 안내글만큼이다. 건강한 사회라면 개인의 나락을 방치하지 않도록 안전망을 두텁게 해야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있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을 지원할 수 있는 순환적 사회 시스템을 저해할 수도 있다.  


넷플릭스, 나라면 넷플릭스에 투자를 하겠다고 언젠가 생각했다. 나는 주식에만 헌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현저히 낮았을 때 그 가치를 알지는 못했다. 7,8년 전 어느 커플의 프랑스 결혼식에서 한 영국인 영화 작가가 넷플릭스를 아느냐고 했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아마 그때쯤 넷플릭스 주식을 많이 사두었어야 했다. 아마 10살 때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정확히 알고, 20살 때쯤 온갖 남자상과 연애에 대한 연구도 끝냈어야 했고, 30살 때쯤 외국에 살기 시작했어도 청약저축도 깨지 않고 꾸준히 들었어야 했고 어쩌면 당신도... 어쨌든 그 영화작가도 넷플릭스 주식까지는 못 사둔 듯하다.  


넷플릭스는 볼 게 많은데 또 볼만한 게 없다. 괜찮다. 우리 모두의 하루가 항상 희망차고 즐거운 건 아니다. 가끔 만나는 괜찮은 한 두 작품이 있다면 충분히 존재가치가 있다. 오징어 게임, 그 괜찮은 한 두 작품일까. 소재의 희소성, 거대한 자본과 시스템, 고퀄의 영상 제작 및 기술의 적절한 집합체로 그렇다고 하고 싶다. 어느 날 평범한 우리 동네 입구에서 영화 촬영을 한다고 한다. 나는 매일 보는 그 평범한 곳이 엄청난 투자를 등에 업고 번쩍번쩍하고 빛나는 최신 장비와 카메라를 갖고 있는 방송국 놈들과 월드 클래스 기술자들에 의해서 전혀 다른 환상적인 이미지와 스토리가 연출되고 결국에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담담하다. 내가 보는 한국인의 보통의 삶은 담담하고 슬프고 또 흥이 넘친다. 하지만 인류를 관통하는 공통 요소를 집어넣어 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으려고 한 점이 보인다. 잔인함과 선정성.


잔인함 안타깝게도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당신이 밟고 있는 땅에 피 한 방울 묻혀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인류는 잔인하다. 잔인하게 타인을 진압하고 통제하고 우위를 차지하려 한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잔인함은 다른 종류의 잔인함이다. 경쟁 그리고 또 경쟁, 목숨을 건 경쟁. 남을 밟고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살아남는 자가 독식하는 경쟁. 한국인은 그것이 익숙하다. 실제 하루하루가 경쟁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실제적인 전쟁은 끝났지만 내 땅에서 일어날 혹시 모를 전쟁을 대비해야 하고,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의 기업 곳곳에서, 여성, 아동, 불편함이 있는 사람들을 배려할 여유가 별로 없는 사회에서 매일 생존 혹은 유지를 위해 각개전투를 펼쳐 나간다. 물론 치열함과는 거리가 먼 소수의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새 룰과 흐름에 적응해야 하고 Yes or No 결과를 양질의 퀄리티로 세상에 없는 어떤 어나더 레벨로 조속히 만들어야 한다. 느린 템포만큼 한국인들이 힘들어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선정성, 이 부분은 한국에서는 깊이 묘사하거나 다루지 않는다. 특히 TV 시리즈 물에서. 이들은 음지에 숨어있는 것이다. 성기 포함 신체의 모든 부분을 평등하게 거리낌 없이 사람들 혹은 카메라 앞에 내놓는 문화는 재미로든 사랑이든 일반적인 한국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성을 이야기하려면 항상 소녀와 소년의 그것처럼 아름답고 수줍게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그 반작용이 로리타, 몰카, 실제로는 매우 높다는 외도율(?), 온라인 성범죄들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다시 말하면,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라는 놀이터가 아니었으면 넣었을까 싶은 과도한 선정적인 묘사들이 있다. 한국인의 보통 정서에는 굳이 저것이 저기서 저렇게 디테일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나 싶은 것들. 


비 한국인들은 돈이 없으면 목숨 걸고 경쟁해야 하고, 게임에 진 약자거나 운이 부족했다고 조직적으로 죽여대는 잔인함에 놀라지만, 한국인들은 저기서 저렇게 변태적 성적 욕구를 드러내야 했나 하고 놀라기도 했을 터. 어쩌면 한국은 대놓고 SEX 하라는 것보다 피 튀기게 경쟁하라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오징어 게임의 세계, 한국, 그 피 튀기는 경쟁이 존재하는 곳 맞다. 느리거나 약하다고 해서 배려를 기대하기 어려운 세상. 


1번 할아버지가 말하듯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차갑고 재미없는 오늘을 사노라면, 가진 건 적었어도 골목 어귀에서 흙먼지를 날리고 놀면서 친구들과 까르륵까르륵 즐겁게 놀았던 그때가 혹은 그때의 내가 그립다는 것. 그리고 그 게임이 끝날 때쯤 밥 먹으러 오라고 불러주던 엄마 목소리가, 내일은 뭐하고 놀까 하고 지쳐 잠드는 그 달달한 땀냄새가 밴 골목이 그리운 것이다. 오징어 게임을 보는 전 세계인들이 잔인함과 약간은 외쿡스러운 성묘사를 걷어내면 보이는 한국인의 숨겨진 레트로 감성을 함께 느끼고 있을까 궁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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