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이 누구길래

산소 같은 고민

by 박보리

어떤 책을 예전부터 사뒀는데 끝까지 다 읽었는가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침대 맡에 서재 책꽂이에 꽂혀있어서 오며 가며 그 책은 수도 없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도대체가 결말이 기억나지 않고 그래서 다 읽었는지 모르겠다. 재미가 없긴 없었나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책. 단지 초반부에 음울하게도 미쳐버린 가정주부의 이야기가 담겨 있던 것만 기억이 났다. 책을 손에 들어보니 중간쯤 애매하게 걸쳐져 있던 책갈피는 나를 더욱 헷갈리게 했고 결국은 거기부터 다시 보게 되었다. 다 읽고 나니 끝까지 다 보았던 책이었다. 그 책은 바로 82년생 김지영.


82년생 전업주부인 내가 읽고 감상평을 써보기 딱인 글이다. 다른 점은 나는 한국인과 결혼하지 않았고 한국에 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여기나 거기나 근본적인 구조적 틀이 아주 다른 것은 아니다. 여성이란 젠더를 갖고 있는 한 개인은 결혼, 출산, 육아 전까지 열심히 살며 여러 난관을 헤쳐가며 성취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산다. 그리고 결국에는 정도는 다르지만 어떤 불공정함 같은 것을 느낀다. 그래도 홍콩에서 영국에서 살면서 육아맘을 맘충이라고 비하하는 듯한 눈치를 받은 적은 없다. 내가 현지 언어를 완벽하게 듣고 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특히 해외 생활하다 보면, 눈치로 더 잘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같은 달이어도 초승달인지 반달인지 보름달인지 상현달인지 하현달인지 매우 다르다는 걸 안다. 같은 여자끼리도 워킹맘과 육아맘 사이,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의 묘한 거리감이 있다. 홍콩과 영국에서는 아이 엄마끼리도 전업주부 혹은 육아 여부, 직업의 종류와 근무형태, 도우미의 유무 및 근무형태, 배우자의 직종 및 근무형태 나아가서는 가사 육아 참여 정도 등에 따라서 삶의 모습이 다양하다. 한국은 덜 다양할 수도 있겠다. 가끔, 혹은 과거보다 좀 더 자주, 사업가로서 성공을 한 엄마들 이야기가 여기저기 보이는 것을 보면 워킹맘으로서의 폭이 넓어진 걸까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 직업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대분류이자 소분류하는 것처럼, 전업맘 혹은 워킹맘으로 나뉘고 나서는 고민과 애환이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그 엄마의 고민이 저 엄마의 고민이고 그 여자의 애환이 저 여자의 한숨과 같은 듯 느껴진다. 시간을 두고 이야기해봐도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결혼, 출산, 육아, 커리어로 같은 고민 중이다. 그래서 그런가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은 초반부에 정신이 살짝 나간 여자 이야기가 나온 부분 빼고는 너무나 흔하고 뻔하고 그래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너무 우울한 '현실 같은' 드라마나 영화는 보지 않게 되는 것처럼. 이 책의 뒷부분은 너무 오래 묵고 썩어서 변하지 않을 현실이기 때문에 피곤했고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모양이다.


그렇게 결말이 도무지가 기억이 나지 않아 책갈피가 꽂혀있던 부분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게 된 '82년생 김지영'




92년생 지영이나 02년생 지영이는 아니 22년생 지영이 정도부터는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좀 더 다양한 고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나 흔하고 뻔한-그래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이 경력단절과 우울한 전업주부의 이야기 말고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사회적 인정을 받고 있는 엄마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출발은 육아맘도 정식적인 직업군에 들어가야 하고 경제적 사회적 생산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커피나 차를 좋아하진 않지만 종종 마시러 간다. 마시는 그 액체보다 그 시공간을 통해서 갖는 그 쉬어감이 주는 만족감이 크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이 수많은 커피숍들이 망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책에서 엄마를 맘충이라 불렀다고 한다. 저런 똘아이 상그지자식을 봤나라고 하며 넌 취미생활이나 하며 돈 벌러 다니냐 하고 나도 비아냥되고 싶지만 그러지 않듯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추고 서로 배려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가 되길 바래본다. 적어도 내 삶이 팍팍하고 내 심장이 좀 꼬였다고 좀 만만해 보이는 남에게 비수를 꽂는 그런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삐그덕 거리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