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끝의 수다
서점은 아이와 잠깐 시간을 보내기 좋다. 다양한 책, 장난감, 인형 등이 나란히 줄을 서서 '나를 좀 보세요' 하고 마구 손짓하는 곳이니까. 예전에 한국 살 때는 내 취향대로 인문학 코너도 기웃, 소설 코너도 기웃, 베스트셀러도 기웃 여기저기 여유롭게 둘러보다가 맘에 드는 책은 골라서 바닥에 철퍼덕 앉아 읽기도 하고, 소장가치가 있어 보이거나 좀 찬찬히 뜸 들이면서 읽고 싶은 책은 몇 권 사들고 오는 재미가 있었다. 어떤 날은 그렇게 서점에서 책을 읽다가 깜박 졸기도 하는데 그럴 때 내 모습을 볼 때면 그렇게 한량 같고 백수 같다 느껴질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당시 백수-취업준비생-였으리라. 때마침 손에 든 책이 경제서적이었고. 일부 경제서적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마냥 멀고 몽롱했다. 모자라는 돈으로 헉헉대며 사는 백수에게 화려한 경제 서적, 재테크 서적들은 예쁘다 허무하게 터져버리는 비눗방울과 같았다.
다시 아이와 함께 가는 영국 서점으로 돌아가서- 수많은 영어서적들이 예쁘게 전시되어 있지만 손이 가지 않는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미드니 영드니 영자신문이니 잡지니 그렇게 재밌게 봤는데 그 문화 속으로 들어오니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남의 나라 말이라 두뇌를 겹겹이 써야 하는 영어보다는 미묘하고 찰진 표현들이 가득 찬 잘 쓴 한국어 책을 읽고 싶다. 수없이 꽂힌 책들을 보며 사람들은 매일매일 입으로 뱉어내는 수많은 말들을 빼고도 이렇게도 할 말이 많은가 보다 하고 느낀다. 내가 책을 내는 일이 생기더라도 이 세상 수많은 책 중에 하나일 뿐이고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면서 한국 독자들에게 쓴 책일텐데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잠시 생각해본다.
아이는 좋아하는 돼지 소리를 코코 내며 페파피그를 향해 간다. 책을 펼쳐 들면 엄마는 점점 요란해져가는 음향효과를 간간이 조절해주며 책을 읽어준다. 아이가 직접 관심 갖는 책을 쳐다보고 빼내 오기 때문에 아이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간다. 아이는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를 모두 알아듣지만 아직 3 단어 이상의 문장을 구사하지 못한다. 주로 영어를 말하지만 그 외 못 알아듣는 수많은 말들은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긴 말이다. 그런 아이가 가끔 책을 지긋이 바라볼 때가 있다. 그 어느 날의 서점의 나른한 나처럼 졸지도 않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책을 보고 있는 아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럴 때는 엄마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어본다. 혼자 생각하고 상상하는 시간을 즐기도록.
남편에게 아이가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라고 하면 글을 그대로 읽지 않고 그림만 보고 참 재미없는 말만 늘어놓는다. 유태인은 아이가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줘서 자는 동안 이어서 꿈을 꾸게 한다고 하기도 하더라. 또한 아빠가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준다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 혼자 다 감동에 젖어 부탁한 건데. 근데 그 책 한번 참 재미없게 읽어준다. 스토리를 씹어먹듯이 읽어주는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스토리라기보다 그림을 나열식으로 이랬다 저랬다 묘사하며, 주로 내용은 누가 졸리다 피곤하다 이러면서 하품을 연달아하고 있으니 그 앞에 멀뚱히 있는 아이나 아빠나 참 안쓰러워 보인다. 남편아 그냥 가서 자, 내가 읽을게 혹은 차라리 놀아주라고 하고 만다. 그럼 둘이 신나게 몸으로 놀다가 어디 하나 부딪쳐서 울면 엄마를 찾는다. 그럼 잘 준비가 된 것이다. 잘 씻겨놓은 아이가 땀에 젖어서 훌쩍거리면 말이다.
골골골 대는 아빠가 몸으로 한껏 놀아준 아이를 침대에 눕혀 우유 한 병 먹여 재우고 나면 이제 엄마의 무음 타임이 온다. 그리고 가끔 체력이 남을 때면 노트북을 열고 브런치에 글을 남겨본다. 하루 종일 입으로 한국어와 영어로 아이에게 재잘재잘 대고 호통치고 애원하고 요란법석을 떨고 나면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 찾아온 고요한 평화 속에서 한국말을 백지에 맘껏 지껄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릴 때부터 아이와 따로 잔 수면습관이 이럴 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오랜 잔소리와 교육이 빛을 발한 것일까. 아님 또 뭔가 잘못한 것인가. 드디어 남편이 저녁 먹은 그릇을 내 것까지 치우고 부엌과 거실을 나름 정리해놓았다. 웬일. 엄마라는 업무복을 벗어놓고 이제 내 마음속의 재잘거림을 타이핑해본다. 하루 종일 잊고 있었던 뱃속의 둘째도 한번 스윽 쓰다듬어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