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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Sep 26. 2024

사자

9~11. 원점으로

9.

그날 저녁, 박과 최는 모텔에 갔다. 둘의 회사가 가까웠으므로 집에서 만나는 것보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 더 빨랐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둘은 서로의 옷을 벗기고, 엉망진창으로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퇴실 안내 전화가 올 때까지 둘은 내내 엉켜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연과 박은 그날 밤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이 밤을 보냈다. 그리고 주방에서, 거실에서, 복도에서, 현관에서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더듬었다. 다른 메이트들과 눈이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연와 박은 악의 없이 웃었다.


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천은 연이 혼자 있을 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 연은 박도, 천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면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고개를 틀어 입을 맞추었다.


최는 이 변화가 불쾌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서로를 배려하지 않았고, 공평한 연애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최는 저들처럼 아무데서나 연을 만지고 끌어안는 상상을 해보았다. 소파에 누워서 연의 옷을 벗기고, 부엌에서, 현관 앞 벽에서, 다용도실에서……. 최는 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상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 실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과 경쟁하고 싶지도 않았다.


최는 연에게 서운했다. 왜 연은 천에게 강하게 주의를 주지 않을까. 왜 덩달아 변해버린 박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왜 이 집의 규칙을 지키고자 하는 나를 멀어지도록 두고 있을까.


일요일 아침이면 최는 더욱 고립된 느낌이었다. 커피를 내리려고 방에서 나오면 연은 누군가와 소파에서 뒹굴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자기 할 일을 하다가 연이 혼자가 되었을 때 다가갔다. 누구도 최의 눈치를 보거나 최를 배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이 되면 최는 일찍 집을 나가버리거나 아예 늦게 일어나곤 했다. 그렇게 정오를 넘겨 거실에 오면 셋은 팔과 다리가 뒤엉킨 채로 최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정말 잘 잤느냐는, 혹은 잘 다녀왔느냐는 무공해의 웃음. 최는 그 웃음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연은 나와 밤을 보낸 지 오래되었다는 걸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  



10.

일요일, 최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하우스 메이트들을 볼 자신이 없었다. 최는 일이 있다며 아침 일찍 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 있는 카페에 갈까 했지만 연과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이 올까 봐 일부러 옆 동네에 있는 2층 카페에 들어갔다.


최는 콜드브루를 한 잔 시켜놓고 연을 생각했다. 최는 애초에 이런 연애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에 들어온 이유는 연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연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연이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집에서 이런 연애를 하는 게 맞을까? 이게 싫다면 많은 사람이 하고 있는 일대일의 연애를 하면 된다. 그런 연애도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런 부당함이나 불편함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연을 떠날 수 있을까? 연의 눈동자, 연의 입술, 연의 손가락, 연의 머리카락, 연의 목소리. 연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최는 콜드브루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이 집에는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을 깬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상황을 바로잡으면 된다.


“벌써 왔어? 빨리 끝났나 보네?”


연은 천의 품에 안긴 채로 소파에서 물었다. 천은 최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연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박이 욕실에서 나왔다.


“일찍 왔네?”


박은 소파에 가서 연의 손을 쓰다듬었다. 최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는 외투를 벗어 소파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서로를 좀 배려하는 건 어때?”


박과 천은 고개를 들어 최를 바라봤다. 연도 소파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박을 쳐다봤다.


“괜찮아?”


연의 말에 최는 화가 치솟았다. 괜찮냐고? 잘못한 건 너희들인데 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지?


연은 팔을 뻗어 최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최는 연의 손을 뿌리쳤다. 연은 당황한 듯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집 분위기가 바뀌어서 좀 혼란스럽지?”


분위기? 혼란? 최는 헛웃음이 나왔다. 연은 지금 최가 왜 이러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다들 이게 좋은 거야? 규칙도, 배려도 없이 경쟁하고 싸움만 부추기는 이 방식이?


연은 다시 한 번 팔을 뻗어 최의 손을 잡으려 했다. 최는 연의 손을 다시 뿌리쳤다. 하지만 연은 다시 팔을 뻗어 최의 손을 잡았다.


최는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연과 박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를 보았다. 천은 관심 없다는 듯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었다. 최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누구라도 말을 꺼내주기를 기다렸지만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결국 최가 박을 보면서 말했다.


“말해 봐. 이게 좋아? 너도?”


박은 연의 손을 쓰다듬으며 최를 달래듯 말했다.


“네가 어떤 마음인지 이해해. 근데…… 글쎄.”


최는 박의 말투가 거슬렸다. 이 분란의 원인이 나라는 말투. 연이 최의 손을 토닥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좀 앉아. 같이 앉아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최는 연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싱글 소파에 앉아 셋을 쳐다봤다. 하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천은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미간을 긁고, 연은 최의 눈치를 봤으며, 박은 연의 손을 쓰다듬기만 했다. 잠시 후, 최는 외투를 집어 방으로 들어갔다.  



11.

일요일 아침, 연은 천의 방에서 나왔다. 박은 주방에 서서 새벽에 배송된 식재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잘 잤어?”


박은 연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연은 박과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물을 마시려 했으나 박은 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연의 입안에 박의 혀가 들어왔다. 연은 웃으며 박을 밀어냈다.


“아직 안 씻었어.”


박은 아쉬운 듯 연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잠시 후, 연, 박, 천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최가 집을 나간 지 두 달. 최가 떠나니 이 집의 규칙도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이 집에는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서로를 옭아매지 말 것.


“이따가 몇 시에 출발할까?”


천이 연에게 말했다. 박의 눈빛이 변했다.


“어디 나가?”

“이 근처에 팝업스토어 오픈했다고 해서.”


천은 박에게 답하고 연에게 물었다.


“이거 먹고 바로 출발할래?”


연은 박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박과 천을 보았다. 긴 웨이브의 헤어스타일, 집에서는 거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과묵함, 약간 와일드한 느낌까지.


둘이 이렇게 닮았던가?

분명히 처음에는 다른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은 인스턴트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고 보니 이 집 어딘가에 핸드드립 세트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연은 갑자기 깔끔한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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