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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Oct 10. 2024

아무에게도 먹히지 않은 포도알 1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포도알이 있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초록 포도알은 매일 아침 콧노래를 부르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자신을 상상했다. 나도 언젠가 저 새처럼, 개미처럼 세상을 구경하며 다니겠지? 이곳에 매달려서 숲에 초록이 차오르는 것만 봐도 이렇게 신기한데, 처음 맡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오면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직접 세상을 돌아다니면 얼마나 신날까.


“뭐가 그렇게 즐겁니?”


포도나무 위를 기던 개미가 말했다.


“세상을 구경할 생각을 하니까 신나서. 나도 곧 너처럼 내 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겠지?”

“정신 차려. 포도가 어떻게 세상을 돌아다니겠니.”


개미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포도알은 깜짝 놀랐다.


“왜? 포도는 세상을 돌아다닐 수 없어?”

“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어야만 살 수 있잖아. 세상을 여행하려면 나뭇가지에서 떨어져야 하는데 그러면 곧 죽는다고.”

“개미는 어디든 갈 수 있는데 포도는 아무데도 못 간다고?”

“당연하지.”


포도알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포도알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뭐…… 그래도 눈앞의 풍경도 멋지니까. 가을에는 이 숲 전체가 붉은색으로 덮인다던데, 그것도 멋지겠지?


개미는 한숨을 한번 푹 쉬고 말했다.


“얘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네가 가을의 붉은 잎들을 어떻게 봐?”

“왜? 포도도 빨간색이 뭔지 아는데?”

“너는 그 전에 죽는다고. 한여름이 되면 모두가 너를 먹으러 오지 않겠어?”

“뭐라고?”


포도알은 머리가 띵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포도알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고, 단단하고, 초록색이었기 때문에 아직 천적이랄 게 없었다.


“네가 완전히 보라색이 되면 다들 너를 먹으러 올 거야. 내가 아니어도 새가, 새가 아니어도 뱀이, 뱀이 아니어도 다른 벌레가 너를 먹으러 온다고.”

“말도 안 돼! 나는 아무도 잡아먹지 않을 건데 나는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거라고?”

“너희는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나잖아. 나 같은 곤충이나 동물이 너희를 먹어서 영양분을 섭취한다고. 아, 대신 우리가 너희의 씨앗을 널리 퍼뜨려 주지. 이게 바로 네가 태어난 이유이자 자연의 섭리야. 어때? 이렇게라도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다면 조금 위안이 되니?”


포도알은 화가 나 소리쳤다.


“어떻게 이게 위안이 되겠어?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고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운명이라는데!  이건 불공평해.”

“일개미인 나도 죽을 때까지 일만 하잖아. 거미한테 잡아먹힌 친구들도 많고. 누구에게나 숙명은 있어. 그러니 그만 열 내렴.”


개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무를 내려갔다. 슬슬 교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왔다. 햇살은 점점 뜨거워졌고 포도알들은 하루가 다르게 익어갔다. 개미의 예언도 현실이 되었다. 통통해진 다른 포도알을 새가 쪼아 먹고, 파리가 나타나 즙을 빨고 알을 낳았다. 세찬 비가 포도알을 땅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초록 포도알이 말했다.


“예전에는 햇살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어. 비를 맞는 것도 좋아했어. 그런데 이젠 햇살도 비도 무서워. 살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해. 진짜 불공평하지 않아?”


친구 포도알이 말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두려워하기만 하면서 사는 건 너무 슬프잖아.”

“하지만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걸. 새나 벌레는 천적과 싸우거나 도망칠 수 있지만 포도는 누구를 피하지도, 싸울 수도 없어. 반드시 찾아올 불행이 언제 오나 기다리면서 사는 느낌이야.”


친구 포도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친구 포도알도 하루하루가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아침, 갈색의 기다란 뱀이 포도나무를 타고 올라왔다. 뱀은 커다란 입을 쩍 벌려 포도알들을 몇 알씩 물어 삼켰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뱀은 나무를 타고 올라와 포도알들을 삼켰다. 이른 아침을 먹고 목이 말라서 포도나무를 찾는 듯했다.


그날도 뱀은 포도나무를 스멀스멀 기고 있었다. 뱀은 가지를 옮겨 다니며 통통하고 짙은 보라색을 띤 포도알을 고르기 시작했다. 포도알들은 겁에 질려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뱀은 나뭇가지 사이를 기어다니다가 한 포도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린 포도알을 달래주던 친구 포도알은 어느덧 그 나무에서 가장 큰 포도알이 되어 있었다. 뱀은 친구 포도알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잠깐만!”


뱀은 입을 쩍 벌린 채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아직 초록빛이 채 가시지 않은 포도알이 뱀을 보고 있었다. 이 포도알이 감히 나에게 소리를 지른 건가? 뱀은 방향을 바꾸어 자신에게 소리친 포도알에게 다가갔다. 포도알은 오들오들 떨며 말했다.


“그…… 우리를 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둬달라고. 넌 우리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잖아.”


포도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뱀은 난생처음 겪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포도알을 쳐다봤다.


“지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가?”


뱀은 포도알에게 다가갔다. 포도알은 너무 무서워서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주어진 수명이라는 게 있으니까,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고 그만큼 살고 싶다고. 이게 뭐 대단한 소원은 아니잖아!”


누군가의 먹이가 되고 싶지 않다고? 포도는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나지 않나? 뱀은 포도알이 한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다가 저런 이상한 소리에 내가 놀아나다니. 뱀은 포도알을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목이 마른걸? 시원하고 달콤한 것을 먹고 싶은데.”

“너는 뱀이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물을 마시러 갈 수도 있고, 달콤한 것을 먹고 싶다면 벌들이 모아놓은 꿀을 먹을 수도 있어.”

“네가 살고 싶으니 벌들이 모아놓은 꿀을 빼앗아 먹어라?”


포도알은 그제야 자신이 한 말의 오류를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뱀은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어. 그런데 지금 날씨를 봐. 해가 이렇게 내리쬐고 있어. 너희는 한여름의 바위 위를 기어본 적이 없지? 그늘 진 곳의 흙은 그나마 밟을 만하지만 직사광선이 내리쬔 바위는 피부가 익어버릴 정도로 뜨거워. 그런데 너희를 위해서 이 날씨에 물이나 벌집을 찾으라고? 내가 왜? 난 여기서 포도를 꼭 먹어야겠어.”


뱀은 초록빛이 채 가시지 않은 포도알 주변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다른 포도알들을 위해 네가 희생하는 건 어때? 너는 맛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네가 희생하겠다면 다른 포도알들은 건드리지 않을게. 오늘은 말이지.”


다른 포도알들은 움찔했다. 친구가 먹히는 건 가슴 아프다. 하지만 저 포도알이 희생하면 우리는 오늘……. 포도알은 눈동자를 굴려 친구들을 살폈다. 친구들은 모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포도알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역시나 포도알의 인생은 이런 거겠지. 한편 뱀은 오랫동안 포도알을 쳐다봤다. 뱀은 이 포도알이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포도알의 귓가에 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뭘 할 건데? 너 같은 포도알 따위가 대단한 대의나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거 아냐.”


포도알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뱀과 포도알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냥…… 그냥 뭐, 너처럼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구경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여기에서 비도 맞고, 꽃도 보고, 향기도 맡고, 노을도 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수명만큼…….”


노을? 비? 우리에게 주어진 수명? 뱀은 코웃음을 쳤다.


“너에게 주어진 수명? 와하하하하. 내가 너를 살려줘도 새나 벌레가 와서 너를 잡아먹을 거야. 그럼 거기까지가 네게 주어진 수명이라고.”


포도알은 발끈해서 말했다.


“매나 독수리한테는 너도 먹이일 뿐이잖아. 너도 매나 독수리한테 잡아먹힌다면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뱀은 포도알을 노려봤다. 뱀은 당장이라도 이 포도알을 씹어 먹을 것 같았다. 포도알은 몸을 움츠리고 말했다.


“미안해. 어쨌든 나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었어.”


뱀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다 해도 네 마지막은 뻔해. 아무에게도 먹히지 않으면 여기에 매달린 채로 썩거나 땅에 떨어져서 썩거나 둘 중 하나야. 그러느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게 낫지 않겠어? 예를 들면 내 갈증을 풀어준다든가.”

“넌 그러지 않아도 살 수 있잖아!”


포도알이 빽 소리를 질렀다. 뱀과 포도알의 눈이 딱 마주쳤다. 포도알은 뱀을 포고 흠칫 놀랐다. 포도알은 작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우리의 마지막이 뻔하다는 건 네 생각이지. 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잖아.”


뱀은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포도알은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네가 우리를 좀 보호해 주면 안 될까? 다른 적들이 우리를 잡아먹지 않게. 너도 본 적 없잖아. 끝까지 살아남은 포도알들이 어떻게 되는지. 너는 움직일 수 있고, 동물 중에서도 강하니까.”


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이 더위에?”

“목이 마른 건 다른 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이런 포도알은 처음이니까. 구경할 가치가 있지 않겠어? 어차피 여름은 얼마 남지 않았잖아.”


뱀은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봤다. 여름 해 덕에 온 세상이 흰색 아니면 노란색이었다. 강렬한 햇볕에 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여름은 얼마 남지 않았잖아.


뱀의 머릿속에 포도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포도알이 나불거리며 사는 것도 기껏해야 몇 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뻔한데. 내가 굳이 저 포도알을 지켜야 하나? 뱀은 고개를 돌려 포도알을 바라봤다.


“제발.”


포도알들은 희망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뱀을 쳐다봤다. 뱀은 당황스러웠다. 숲에 사는 존재들은 모두 뱀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저 포도알 따위가 내게 희망을 갈구하다니……. 뱀은 당장이라도 입을 벌려 포도알들을 먹으려 했지만 생각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뱀은 어색하게 더듬더듬 말했다.


“목이 말라서 견딜 수 없으면 언제든 너희를 먹어 치울 거야. 여름은 더우니까. 그렇게 돼도 오늘 너희를 살려둔 은혜를 생각하라고.”


뱀은 말을 마치자마자 나뭇가지들을 타고 땅으로 내려갔다. 뒤에서 포도알들이 고맙다고 소리쳤지만 뱀은 돌아보지 않았다.


뱀은 그늘진 땅을 골라 기어갔다. 최대한 그늘 쪽으로 기었지만 땅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뱀은 바싹바싹 목이 탔다. 이까짓 여름, 더 살아봤자 뭐가 있다고. 뱀은 아까 포도알이 한 황당한 말들을 되뇌며 물웅덩이를 향해 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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