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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Oct 10. 2024

아무에게도 먹히지 않은 포도알 2

다음 날, 뱀은 약속대로 포도나뭇가지에 앉아 포도알을 관찰했다. 새들이 날아와 포도알을 쪼아 먹으려고 하면 재빨리 기어 가 입을 벌려 새들을 위협했다. 벌이나 파리가 접근하면 꼬리를 휘둘러 쫓았다. 언제 누가 다가올지 모르므로 뱀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적이 없을 때 포도알을 지키는 것은 예상대로 지루한 일이었다. 그리고 들인 시간에 비해 포도알들이 모두 안전하지도 않았다. 미처 보지 못한 사이 파리가 포도알에 알을 낳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려 포도알이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뱀이 지키고 선 탓에 예전처럼 포도알이 쑥쑥 줄어들지는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하늘을 날던 매가 포도나무 위에 있는 뱀을 발견했다. 뱀은 포도알을 쪼아 먹으려는 새를 쫓고 있었다. 매는 재빠르게 하강했지만 이리저리 얽힌 나뭇가지 때문에 뱀을 채 가지 못했다. 뱀은 빽빽한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허둥지둥 기어 들어갔다. 그간 이 나무에서 포도알들을 지켰기 때문에 어디에 숨어야 하는지를 단숨에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가 발톱을 세워 공격할 때마다 나뭇잎과 포도알이 우수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뱀 역시 매의 발톱과 나뭇가지에 긁혀 상처를 입었다.


한동안 소모전을 치르고 나서야 매는 포도나무를 떠났다. 뱀은 매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도 한참을 나뭇가지 사이에 머물렀다. 그리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땅으로 내려갔다. 나무에 매달린 포도알들은 뱀이 땅바닥에 떨어진 포도알을 먹어 치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뱀은 지쳤고 지금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뱀은 포도알을 쳐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 날, 뱀은 나타나지 않았다. 포도알들은 그날 몇몇 적에게 습격을 당했다. 참새 무리가 와서 포도알을 쪼아 먹었다. 파리들이 다가와 터진 포도알 틈에 알을 낳았다. 벌이 날아와 포도의 즙을 빨고 갔다.


“어차피 우린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포도알 중 하나가 말했다. 몸에 초록빛을 띠던 포도알도 이제 완전히 보라색이 되었다. 보라색 포도알은 어제 뱀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날 밤, 포도알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뱀이 포도나무를 타고 느릿느릿 올라오고 있었다. 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며 포도알들의 상태를 살폈다.


“저…… 괜찮아?”


완전히 보라색이 된 포도알이 물었다. 뱀은 포도알을 쳐다보지도 않고 근처에 있는 나뭇잎들의 위치를 섬세하게 바꾸었다. 포도알들은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하늘에서는 포도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뱀은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일은 비가 올 거야.”


우리가 빗방울을 맞아 떨어질까 봐……. 포도알은 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뱀은 이미 뒤돌아 나무를 내려가고 있었다. 포도알은 다급히 뱀에게 말했다.


“많이 다쳤을까 봐 걱정했어.”


뱀은 대답하지 않고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갔다. 땅에는 벌레들이 반쯤 먹어치운 포도알들이 있었다. 뱀은 그 포도알들을 곁눈으로 보고 땅을 기었다.


바닥을 길 때마다 상처 난 부위가 쓰리가 따가웠지만 뱀은 오늘 포도알들을 보러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도알들을 진작 먹어치웠으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 이 포도알들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어제 매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뱀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매일 덥다고 투덜거렸던 여름이지만 어떻게든 더 살고 싶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뱀은 같은 시간에 다시 나타났다. 포도알들은 매일 조금씩 더 영글어 가는 것을 보았다. 포도알들은 더 커지고, 더 진한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뱀은 어느덧 이 생활이 익숙해졌다. 벌레나 새가 접근하려 하면 뱀은 이미 그곳에 가서 적을 위협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지면 포도나무 주변에서 사냥을 했다. 햇살이 점차 뜨거워지면 포도 넝쿨 사이에서 더위를 피했다.


매일 같은 패턴으로 지내다 보니 포도알과 함께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시간도 많아졌다. 해가 내리쬐는 날에는 그늘에 앉아 샛노란색이 된 숲을 내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나뭇잎에 튕겨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보고 비에 젖은 풀 냄새를 맡았다. 흐린 날에는 회색빛이 된 세상을 보고 공기중에 떠도는 수증기 냄새를 맡았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멀리서 날아오는 낯선 흙 향기를 맡았다. 비록 나뭇잎들에 가려 넓게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가만히 구경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포도알은 다시 예전의 발랄한 포도알로 돌아왔다. 다시 햇살을 사랑하게 되었다. 시원한 빗물을 좋아하게 되었다. 두려움이 사라지자 햇살과 빗물은 다시 햇살과 빗물이 되었다. 포도알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뱀에게 온종일 말을 걸었다. 자기는 이렇게 뜨거운 햇살이 좋은데 동물은 이런 햇살을 싫어하는 것 같다는 둥, 이렇게 굵은 빗방울은 태어나서 처음 맞아본다는 둥, 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저 비를 맞고 다 떨어져 버렸을 거라는 둥, 이렇게 핑크빛으로 물드는 하늘은 처음 봤다는 둥, 처음 봤을 때는 네가 참 무서웠다는 둥……. 뱀은 포도알이 무슨 말을 하든 대답하지 않았다. 어쩔 때는 포도알이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멀찍이서 포도알들을 지키고 싶었지만 불시에 새나 벌레의 공격을 받을까 봐 꾹 참고 자리를 지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포도알이 울먹이는 것보다는 신이 나 재잘거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 그날은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낮에 날아든 새와, 다른 뱀과, 벌레를 간단히 물리치고 포도알과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젠 바람이 선선하네.”


포도알의 말에 뱀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굴로 돌아갈 때 땅과 돌이 꽤 시원했다. 뱀은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껴봤다. 바람은 여전히 습하지만 어제보다 훨씬 선선했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멋진 풍경을 마음 졸이지 않고 본 포도알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뱀은 머쓱해져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게 뭐가 대단하다고. 여기보다 더 멋진 곳도 있어.”

“그렇겠네. 너는 어디에나 갈 수 있으니까.”


포도알이 말했다. 뱀은 아차 싶었지만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포도알이 웃으며 말했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 얘기 좀 해줄래?”


뱀은 당황했다. 여기보다 더 멋진 곳이 있다고는 말했지만 풍경 위주로 주변을 본 적이 없었다. 자연은 언제나 뱀의 사냥터였고, 사냥감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한번은 먹잇감을 쫓다가 아주아주 높은 나무에 한번 올라가 본 적이 있지만…… 뱀은 말솜씨가 없었다. 뱀은 말을 고르다가 머리가 아파왔다.


“설명할 수 없어.”


포도알은 웃으며 말했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곳이었나 보다.”


평소라면 세상이 샛노랄 시간이었지만 포도알과 뱀은 옅은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며칠 후, 새벽부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포도알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아.”

“맞아. 우리는 꽤 무거워졌고, 이제는 물컹해질 일만 남았어.”

“그래도 우리 생각보다는 오래 살았어.”

“맞아. 우리 생각보다 오래 살았어.”

“나는 아마 곧 땅에 떨어질 거야. 그리고 썩기 시작하겠지.”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도알이 말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뱀에게 먹히는 게 좋겠지? 지금껏 나를 지켜줬으니까.”


친구들이 깜짝 놀라 말했다.


“뭐? 그건 네가 원하던 마지막이 아니잖아!”

“맞아. 그런데 이제는 그러고 싶어졌어. 뱀 덕에 나는 여름 내내 빗물도, 햇살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


그날, 뱀은 평소와 같은 시각에 나타났다. 포도알은 빗물을 맞아 흔들거리며 말했다.


“ 오늘 중으로 땅에 떨어질 것 같아. 개미나 벌레들의 먹이가 되기 전에 나를 먹는 건 어때? 나는 아직 달고 즙이 많아.”


뱀은 당황했다. 늘 살고 싶다고 당돌하게 말하던 포도알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뱀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겨우 이런 마지막을 보여주려고 나한테 그 고생을 시킨 거야?”


포도알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그런데 네 말이 맞았어. 포도알한테 특별한 마지막은 없었어.”


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며 허, 참 나 등 의미 없는 소리만 쏟아냈다. 포도알이 계속 말했다.


“벌레의 먹이가 되고 싶지는 않아. 나는 네 덕에 여름이 지나는 걸 다 봤는걸.”


주변의 다른 포도알들은 말없이 둘을 쳐다봤다. 뱀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는 여름 내내 너희를 지키려고 노력했어. 그러니까 너도 약속을 지켜. 나보고 널 잡아먹으라고 하지 말고 평범하게 죽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라고.”

“미안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젠 힘이 없어.”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지자 포도알은 크게 흔들거렸다. 뱀은 얼른 다가가 포도알의 몸을 받쳤다. 뱀이 말했다.


“이 비가 다 내린 다음에는 가을이 시작될 거야. 초록 잎들이 붉게 변할 거라고.”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뭇잎들이 붉게 변하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포도알은 웃으며 말했다.


“멋지겠네.”


포도알은 눈앞의 숲을 둘러보다가 눈을 감았다. 아마 붉어진 숲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날은 더 거세게 비가 내렸다. 포도알은 예감했다. 오늘 나는 나무에서 떨어질 것이다. 포도알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벌레들에게 먹히기 전에 뱀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비가 와서인지 뱀은 오늘 오지 않았다. 굴이 물에 잠겼을까.


포도알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포도알은 커다란 빗방울을 맞고 툭 땅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포도알은 어느 존재보다도 오래, 편안하게 세상을 구경했다.


한평생 공중에 떠 있던 포도알의 몸 아래 검게 젖은 흙이 있었다. 바람에 쓸려 왔던 향기보다 훨씬 진한 흙과 풀 향기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잠시 후, 지렁이와 쇠똥구리, 개미들이 포도알에게 다가왔다. 그때 수풀 사이에서 뱀이 나타났다. 별레들은 뱀을 피해 순식간에 흩어졌다. 뱀이 말했다.


“너…….”


포도알은 웃으면서 말했다.


“일부러 떨어진 거 아냐. 네 말대로 나무에 매달려 있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뱀은 웃지도 않고 포도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포도알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나는 갓 떨어졌고, 달콤하고, 과즙도 많다고.”


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포도알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포도알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포도알은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자신이 뱀의 입안에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포도알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는 뱀에게 보답할 차례다. 하지만 포도알이 아무리 기다려도 뱀은 포도알을 깨물지 않았다. 뱀은 미세하지만 입을 떨고 있었다. 포도알은 눈을 살짝 떴다. 눈앞에 뱀의 쭈글쭈글한 입천장과 단단한 이빨이 보였다. 뱀은 포도알을 입 안에 살짝 머금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뱀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 입안 말고 바깥을 봐.”


포도알은 눈을 뜨고 뱀의 이빨 너머를 보았다.


“이게 매일 내가 다니는 땅이야.”


포도알의 눈앞에서 검고, 붉고, 초록의 땅이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스르륵, 스르륵. 뱀이 땅 위를 기어가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그리고 땅 곳곳에 박혀 있는 이끼, 모래, 나뭇잎, 자갈……. 이것들은 나무에서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향기와 형태로 포도알 앞에 펼쳐졌다가 사라졌다. 포도알은 난생 처음 펼쳐진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인가를 이동하자 뱀은 걸음을 멈추었다. 포도알은 눈동자를 돌려 이곳이 어디인지를 살폈다. 뱀은 입을 벌려 포도알을 떨구었다.


“이게 돌의 감촉이야.”


뱀은 포도알이 굴러 떨어질까 봐 포도알의 주변을 몸으로 동그랗게 감쌌다. 그러고는 포도알을 돌 위에서 살살 굴렸다. 돌은 맨들맨들한 부분도 있었지만 아주 거친 면도 있었다. 나뭇가지도 거칠었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느낌이었다. 포도알이 소리쳤다.


“나뭇가지랑은 완전히 달라!”


포도알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의 감촉을 느꼈다. 하지만 뱀은 이내 포도알이 움직이지 못하게 몸통으로 꼭 감쌌다. 계속 돌 위에서 구르다가는 포도알이 상해버릴 게 뻔했다. 뱀은 포도알을 안은 채 그 자리에 한동안 머물렀다. 포도알은 돌의 차갑고 거친 감촉과 오돌도톨한 면을 충분히 구경했다.


뱀은 포도알을 물고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는 더 세찬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가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한 걸까. 이 비를 맞았다가는 뱀도 나도 찢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포도알은 걱정이 되었다. 뱀은 다시 포도알을 뱉어 어딘가에 내려놓았다.


“이건 개울이야.”


뱀은 비가 와 불어난 개울 옆 모래 위에 포도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개울물은 아주 힘차게, 굉음을 내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포도알은 뱀에게 찰싹 붙어서 말했다.


“이렇게 무서운 물이 세상에 있었어?”

“평소에는 안 이래. 비가 와서 불어난 거야.”

“저 물은 마치 매 같아. 누군가를 공격하려고 가는 건 아니겠지?”

“비가 그치면 다시 얌전해질 거야. 가까이에만 가지 않으면 안전해.”


뱀은 한동안 포도알을 땅에 두었다. 하지만 물이 점점 불어나는 바람에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감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뱀은 포도알을 다시 입에 물었다. 뱀은 포도알에게 잘린 나무의 밑동을 보여줬다. 굴에서 뛰쳐 올라오는 두더지과, 집을 버리고 가는 거미, 비를 맞으러 나온 지렁이, 거름이 되어가는 나뭇잎, 흙을 완전히 삼켜버린 웅덩이…… 포도알은 비 오는 날의 숲속을 구석구석 감상했다. 한평생 숲에서 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구석구석을 보니 포도알은 자신이 이 숲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뱀은 포도알을 다시 물고 땅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포도알은 뱀의 입 밖을 보며 이번에는 무엇을 보게 될지를 상상했다. 포도알의 눈앞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뱀은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포도알은 뱀의 입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뱀은 포도알을 내려주지 않고 위로, 더 위로 올라가기만 했다. 혹시 천적에게 쫓기는 걸까? 포도알의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쯤, 드디어 뱀이 걸음을 멈추었다. 뱀은 또아리를 틀고 그 가운데에 포도알을 뱉어냈다.


“오늘은 비가 와서 숲이 제대로 안 보이지만…….”


포도알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이 광경을 설명할 수 없다던 뱀의 말이 떠올랐다. 포도알은 나무의 정수리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포도알의 앞에는 세상의 모든 나무가 하얀 물안개를 뚫고 정수리를 보이고 있었다.


포도알이 울먹이며 말했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뱀은 입을 떼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뱀은 겨우 입을 떼어 말했다.


“더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며칠 정도는 나도 느긋하게 있을 수 있으니까.”


포도알은 안개에 휩싸인 짙은 초록을 바라보았다. 포도알은 뱀에게 말했다.


“나만큼 세상 곳곳을 본 포도알은 없을 거야.”


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비를 맞아본 포도알도 없을 거야.”


뱀은 대답하지 않았다.


“뱀이 이렇게 지켜준 포도알도…….”


포도알은 말을 맺을 수 없었다. 말을 맺으려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지만 목구멍이 꽉 막혀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어차피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뱀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비도 마음도 조금 진정되면, 그때 더 큰 소리로, 차분히 말해야지. 그리고 빗소리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 뱀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먹히지 않은 포도알이지.”


포도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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