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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Feb 05. 2018

엄마에게 하지 못한 말

토요일에 본가에 내려갔다. 독립한 지 10여 년. 최근 이래저래 일이 있어 한 달여 동안 집에 내려가지 않았는데 며칠 전 불길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에서 엄마는 요즘 가슴이 좀 이상하다며, 유방암이 의심되지만 아마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제발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래 유방암에 걸리면 가슴에서 보라색 진물이 나오고 그런다더라고 말했는데 엄마는 얼마 전 가슴에서 보라색은 아니지만 갈색 진물이 나왔노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으로 잠에서 깼고 이번 주말에는 반드시 집에 내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로 말하자면 살가운 딸은 아니다.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도 없고 좋은 일이 생겨도 나쁜 일이 생겨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뚝뚝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모르는, 부모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답답한 딸이다. 나도 나의 문제를 알지만 어쩌겠는가. 3n년 동안 이렇게 살아온 것을.



불안한 마음을 품고 부랴부랴 집에 내려갔지만 나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엄마는 평소처럼 모습으로 종종거리며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었고 내가 잠깐 쉬는 동안 도비처럼 잠자리를 봐주었으며 적당한 타이밍이 올 때마다 내 근황을 궁금해했다. 엄마의 건강한 모습을 확인한 나는 바보처럼 시큰둥한 말투로 최근 그다지 큰 이슈가 없으며 따뜻하게 잘 지낸다고, 파김치가 잘 익었고 설거지는 이따가 내가 할 테니 여기에 와서 TV나 보자고 말했다. 물론 엄마는 절대 내 옆에 와서 쉬지 않았고 나는 그런 모습에 또 짜증이 났다.



설 전이라 집에는 언니와 조카들이 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느니 조카들과 놀아주는 편을 택했다. 색칠공부도 하고 <번개맨>도 같이 보고, 퍼즐을 맞추고 꿀꽈배기도 나누어 먹었다. 엄마 질문에는 팩트만 대답하는 것도 귀찮았지만 조카의 말은 그 주제가 무엇이든 끝까지 들어주었고 다정하게, 성의껏 대답했다. 분명 집에 돌아오면 내가 후회하리라는 걸 알았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도 같은 패턴이었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조카 둘과 놀아주다 보니 점심시간.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다가 슬 돌아가자며 언니네와 함께 짐을 쌌다. 집에 돌아가는 건 늘 갑작스레 느껴진다. 다들 추리닝을 입고 뒹굴다가 누구 하나가 “슬 가자”라고 말을 하면 그때까지의 평온함은 사라지고 일사분란하게 떠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 준비란 30분 내에 끝난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 하지만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자리를 떴다.



짧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조카들을 차례로 카시트에 앉히고 어른들도 안전벨트를 맸다. 잘 지내고, 보일러 따뜻하게 틀고, 밥 굶지 말고, 옷 얇게 입지 말고, 도착하면 꼭 전화해라. 주차장까지 따라 나온 엄마가 반쯤 열린 앞창을 통해 속사포처럼 언니와 나에게 말했다. 그때였다. 조카가 닫힌 뒷좌석 창문 안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외쳤다.



“할머니 사랑해!!!!!”



하지만 엄마는 갑작스럽게 떠나는 통에 집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언니에게 계속 전했다. 아까 싼 김밥이 어떠하니 오늘 밤에 꼭 먹어야 한다고. 엄마가 조카에게 답하지 않자  조카는 상체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외쳤다.



“할머니 사랑해!!!!!”



엄마는 뒷좌석 쪽으로 와 조카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할머니도 지수 사랑해.”



역시 어린아이는 당해낼 수가 없구나. 울컥 눈물이 끓어올라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용히 생각해봤다.



“나도.”



이렇게 한 마디만 거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럼 엄마는 더 행복해졌을 텐데. 지난날을 곰곰 돌이켜보니 엄마는 바보 같은 딸을 낳아 실컷 고생만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한 번 못 들어본 사람이었다. 원래는 저 정도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카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환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 그건 정말로 행복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온 힘을 다해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와 동물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안다. 바보같은 어른만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쩔쩔맨다.나는 그 어른들 중 가장 꼭대기에 있는, 아주 무뚝뚝한 딸이므로 아마 조만간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에게 이 글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진짜 무심하게 카톡으로 링크만 툭 보내겠지만 말이다. 오늘도 내가 엄마 많이 걱정하고 있고 또 사랑한다고,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되게 멋없는 방식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는 이렇게 사랑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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