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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May 17. 2018

나이와 경험이라는 함정

끝내주는 학생을 소개받았다. 사실 아직 소개받은 단계는 아니고 선생인 친구가 문득 전화로 소개해주고 싶은 학생이 있다고 했다. 매우 유니크한 매력의 소유자인데 또래들과는 뭔가 다르고 글쓰기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뭐 얼마나 대단한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교원 평가 때 쓴 글을 읽어준다.



‘박 선생님의 수업에는 영어에 대한 지식 외에도 교사라면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하는가가 담겨 있었습니다. 영어 교사로서 지금의 자세와 시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게 교원 평가서라고? 아…… 과연 눈에 띌 만하다. 그 아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해달라 하니 평소 원문으로 된 한시를 즐겨 읽고, 졸업 후에도 취미로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으며, 또래를 친구라기보다 귀여운 동생들처럼 보는 것 같단다. 자기한테 편지도 써줬는데 교무실 선생님 모두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현학적이었다고;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뭘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듯해 나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는데 문득 학생 때가 떠오른다. 그래, 학교 다닐 때도 그런 친구가 있었지. 본인만의 아우라로 주변인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말을 천천히 하며, 차분하고, 어쩐지 나를 동생처럼 보는 친구. 내가 말을 걸면 친절히 받아주기는 하지만 그쪽에서 나를 찾는 일은 별로 없는.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콩닥였다.



만약 그 아이가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면 알려주라고 몇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는데 말할수록 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나는 이것저것 신이 나서 말하고 상대는 친절히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적극적인 관심은 보이지 않는 상황. 그래, 상대는 매우 유니크한 매력의 소유자니까. 나는 평범한 사람이잖아. 하지만 상대는 갓 스무 살, 나는 3n살. 나이만큼의 경험과 지식이 있으니 그 아이에게 뭔가 해줄 얘기가 있지 않을까?



순간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나 방금 되게 꼰대 같지 않았어? 나이는 그 사람의 지혜를 드러내는 표준 수치가 아니다. 게다가 내가 쌓은 것들은 평범한 사람이 얻은 평범한 경험과 지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람 간에는 어떤 경험을 쌓아도 메울 수 없는 갭이란 게 존재하는데 그걸 억지로 메워서라도 말해줄 만한 무언가를 나는 가지고 있는가? 심지어 그렇게 특별한 아이에게? 내가 조언이라고 하는 말들이 잘못 전달돼 오히려 그 아이를 평범한 세계로 끌어내리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게다가 우리의 만남이 성립되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걔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할까?”

“……그렇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우리 둘 다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게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아이에게는 진짜 ‘브릴리언트’한 친구가 필요하지 우리 같은 ‘친절한 범인’은 아니라고(젠장). 나이와 경험에 자뻑하며 ‘넌 이게 필요할 거야’라고 함부로 제안하지 말자고. 사실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지만…….



그 아이를 만날 일이 사라지니 더 그 아이가 궁금하다. 그 아이는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게 재미없다면 무엇이 재미있을까. 그 아이는 지금 자신이 가진 지식에 만족할까 아니면 자신만 아는 부족함에 괴로워할까.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건 어떤 느낌일까.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사는 법밖에 터득하지 못한 나는 영원히 그 아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이와 경험으로도 메울 수 없는 거리에 그 아이가 서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 아이가 궁금하다. 그리고 이런 질투 어린 글이나 쓰고 있을 만큼 아주 많이 부럽다. 뭐, 평범한 인간으로서 꼰대가 되는 고속도로를 타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이렇게 정신 승리하고 이제 일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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