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졸쪼 May 18. 2018

작년부터 L입니다


나는 L이다. L 사이즈 옷을 입는다. 키가 157밖에 되지 않아 20대 때까지는 자신이 S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뭘 입든 사이즈를 고민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스물일곱 살 때였던가, 백화점에서 반팔 티셔츠에 고개를 넣는 순간 아, 나는 이제 S가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래, S 안 맞으면 M 입으면 되지 뭐. 하지만 M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잠시, L의 세계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지난여름, 평소 입고 다니던 여름 슬랙스가 꽤 마음에 들어 다른 색깔로도 쟁여두려고 쇼핑몰에 접속했다. 회색과 검정은 이미 가지고 있으니 흰색과 다크그레이를 주문했는데 배송된 옷을 입어보니 웬걸, 작다! 가지고 있던 검정 바지를 뒤집어봤는데 사이즈는 같은 M. 고객센터에 전화하니 고객님들이 슬림핏을 좋아해서 사이즈가 줄었단다. 지금 받아본 상품이 작으면 L을 입으라며 굉장히 쿨하게 권하는데 L이요? 엘? 에에에엘? 라지의 그 엘?



160센티도 안 되는 내가 L을 입어야 한다니, 아이고 이게 말세가 아니면 뭐가 말세냐. M까지는 인정했지만 이렇게 얼렁뚱땅 L로는 넘어갈 수 없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중생은 결국 환불 접수를 했고 며칠간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라지라고? 그럼 나보다 키 큰 언니들은 도대체 뭘 입고 다니는 거지? 라지는 절대 내 영역이 아니라며 며칠간 염불을 외웠지만 그 염불들이 무색하게 나는 곧 단골 옷가게에서 또 라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 블라우스는 지금 L 사이즈밖에 재고가 없으니 디자인만 보세요."



'그래, 모양만 보고 M 주문하면 되니까'라고 생각하며 피팅룸에 들어갔는데 목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 뭐야 이 적당한 낙낙함! 이것은 마치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해변을 산책하며 바람을 맞는 느낌!



뇌가 기억하는 L의 이미지와 몸이 느끼는 편안함 사이에서 혼돈을 느끼고 있으니 매니저님이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 사이즈 크게 입는 걸 추천한단다. 나는 지금도 낙낙한 M인데…… 낙낙한 M인데를 되뇌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는 카드와 영수증이 들려 있었고 며칠 뒤 그 블라우스는 나의 여름 최애템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웬만하면 L을 고집하게 되었다.



오늘 서랍 정리 겸 최애템 L 블라우스를 꺼내보니 이걸 입을 생각에 문득 기분이 좋다. 그러고 보면 절대 내 영역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룰루랄라 좋아하는 것들이 또 있다. 가령 최고의 일개미인 내가 지금 프리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나, 20대 때는 마시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 각종 술, 인문서는 거들떠도 안 봤으면서 돌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고 싶다고 선언한 걸 보면 ‘절대 내 영역이 아니야’라는 말은 웬만하면 좀 넣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L은 정말 좋은 사이즈였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S에서 L로 넘어오는 데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단계는 XL인데 절대 내 영역이 아니라는 확언은 하지 않을 테니 제발 그게 올해는 아니길 바란다. L로 넘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다고……. 그리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 슬랙스 그냥 살걸, 흑.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와 경험이라는 함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