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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Aug 06. 2018

나의 오랜 친구에게

손목과 허리는 괜찮으신가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으레 손목과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나는 막연히 짐작만 할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과 처음 만난 열일곱 살, 우리는 막연히 누구와 연애를 하고 누가 먼저 결혼할지만 궁금해했을 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으니까요. 어쩌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이렇게 나만 그 시절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혼자 있네요.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한 당신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꿈을 꺾지 않았습니다. 용돈을 모아 <과학동아>를 사 읽었고, 시험을 코앞에 두고도 실험에 몰두했지요. 고3 시절에는 담임 선생님에게 이제 실험 좀 그만하고 공부를 하라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외골수인 당신을 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속 좁은 현실주의자라 꿈이고 뭐고 눈앞에 놓인 미션들만 쳐내기에도 힘에 부쳤거든요.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던 나는 어디에든 적당히 수요가 있을 법한 일본어를 전공으로 택했고 당신은 단 하나의 목표를 두고 날아가는 다트처럼 나노전자공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당신은 대학원생이 되어 랩실을 지켰지요. 덕분에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높은 산자락에 있는 랩실까지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인데도 몇 년간 학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높은 경사와 학식에 투덜거리는 나와 달리 그곳에서 당신은 늘 웃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태양광과 같은 조도의 형광등도 발명했고 또 연애도 했지요. 겉으로는 투덜거렸으나 실은 그때 역시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남들 보기에 적당한 것들을 선택했다가 이내 포기해버리는 나와는 달리 당신은 학위도,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모두 '과학자'라는 꿈을 향해 달리는 도중 성취해냈으니까요. 수많은 현실의 벽에 무릎 꿇은 나와는 달리 당신은 꿈을 위해서라면 벽을 뚫어서라도 길을 만드는 씩씩하고 건강한 학자였습니다.


그러던 당신이 올해, 과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접고 정치계로 몸을 돌렸습니다. 아이 때문에 현실과 타협했다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절대 하지 못하는 당신의 성격을 알기에 그것 역시 당신의 새 꿈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비록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요.


열일곱 살에 만났는데 당신을 어느덧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나이만큼 세월이 더 흘렀네요. 단 한 번도 자신이 원치 않는 선택을 하지 않은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이 나와 같은 나이일지라도요. 몇 명의 어머니가 되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꺾지 마시길 바랍니다. 17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당신을 쭉 존경할 수 있도록 당신만의 길을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랩실에서 보여줬던 그 웃는 얼굴로, 이제는 당신의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수험 시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분명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앞으로도 큰 즐거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나도 지금까지와는 좀 다르게 살아보려 합니다. 당신처럼 씩씩하고 건강하게 목표만을 위해 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갈 데까지는 가보려 합니다. 내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당신 주변에 누가 사라지고 또 나타나더라도 서로의 자리는 앞으로도 접이식 의자처럼 때로는 넓게 그리고 좁게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날 내 자리가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면 나를 위해 이따금 기도해주세요. 혼자서도 당당하게, 멋진 할머니가 되게 해달라고. 당신은 오랜 크리스찬이니 아무것도 믿지 않는 나보다는 기도가 잘 먹히리라 생각합니다. 많이 바쁘겠지만 가끔 나를 떠올려주길 바랍니다. 




김은경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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