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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라 Dec 25. 2019

반디와의 10년

5. 이사


5. 이사 (4)


  겨울방학에 접어들면서 이모는 이번 방학은 학구적인 코드로 가는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제안하는 것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자금이 없는 피터의 사무실은 현상유지하기 바쁘고 우리는 긴축재정상태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럴때 어울리는 계획은 학구적인 코드로 가는 것이 최고다. 공부를 열심히 안하면서도 잘하는 요섭은 심드렁하게 찬성을 했고 늘 성실한 마리는 적극 찬성했으며 나는 독서가 좋아서 찬성했다. 

  이모는 방학에 읽을 도서목록을 작성하고 다 읽은 후에 함께 나눌 토론회까지 구상 했다. 이참에 일이 없어 시간이 많은 피터가 자기도 책을 읽겠다고 나서서 어른을 위한 도서목록까지 만들어야 했다. 피터는 이 기회에 파우스트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같은 책을 보겠다고 했으나 이모가 말렸다. 피터는 지금 힘드니 가급적 쉽게 읽히는 책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이모가 우리에게 읽히고 싶은 책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모는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와 헤르만 헷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같은 책을 안 읽고 청소년기를 마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책들을 우리가 읽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뿌듯하지만 아직 적절한 시기가 아니어서 아쉽다고 여러 번 말했다.

  마리는 그동안 책을 착실히 읽었으나 요섭은 그렇지 못했다. 열심히 권했어도 절대 읽는 법이 없어서 저렇게 책을 안 읽고 어른이 되면 대체 얼마나 무식할까 이모의 걱정이 컸다. 

  그러나 요섭이 열심히 읽은 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삼국지였다. 7살 때 50권짜리 만화삼국지가 시작이었는데 책의 첫 장에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 라는 글귀에 요섭이 꽂혀버렸다. 만화를 시작으로 번역판까지 세 번을 넘겨 수차례 읽었다. 나는 요섭이 읽은 깨알 같은 글씨의 삼국지를 들춰 볼 때마다 이것을 여러 번 읽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목록의 책을 요섭이 잘 안 읽자 이모는 차라리 다른 작가의 삼국지를 읽히기로 했다. 더러 조악하기도 한 국적불명의 삼국지 보다 한국의 거물작가가 쓴 삼국지를 읽는다면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힘차고 정교한 문체가 요섭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탄력을 받으면 다른 책도 탐을 낼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이모는 요섭이 다 읽을지에 대해 신뢰가 가지 않아서 일단 빌려서 읽게 했지만 푹 빠져들어 읽는 폼이 마음에 들어 3권째 읽게 되었을 때 10권으로 된 전량을 무리해서 구입했다. 빳빳한 새 책이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요섭의 책상위에 놓이자 이모의 표정은 부자가 된 것처럼 포만감으로 가득했다. 

  그 겨울, 우리는 집에서 겨울잠을 자듯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마음과 정신을 살찌웠다. 나는 마음속에 잔뜩 쌓여 있는 돌들을 몇 개 들어냈고 구멍 난 공간을 지식으로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내는 이제까지의 겨울 중 가장 따뜻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후끈한 실내온도가 말할 수 없이 아늑했다. 반디는 책 읽는 시간과 토론하는 시간을 온전히 함께 했다. 우리가 밖에 나가지 않고 모여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반디의 정신세계는 풍요롭고 안정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보다 더 많은 장난을 치고 싶어 했으며 실눈을 뜨고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반디가 실눈을 뜨고 누워있을 때는 더없이 편안할 때이다.

  실내가 따뜻하니 반디를 목욕시킨 후 젖은 채로 이리저리 날뛰도록 그냥 두어도 상관없었으며 겨울이면 실내에서도 입던 옷을 산책 할 때만 입게 되었다. 우리는 반디가 옷을 입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저 외모야 어떻든 편안한쪽에 가치를 두는 우리로 인하여 반디는 예쁜 치장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강아지들이 스스로 예쁘다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지금 우리가 너에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라고 확신에 차서 말 할 수는 없다. 다만 옷을 입혔다가 벗기면 좋아서 날뛰다가 입었던 옷을 물어서 한참을 흔들다가 구석에 처박아 두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겨울방학동안을 온 식구가 다량의 독서로 보낸 것은 이모의 자존심이었다. 이모에게는 잡고 있어야 할 것이 필요한 겨울이었다.

그 겨울, 추위를 피해 동남아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겨울, 스키장에 인파가 몰리고 호텔의 패키지 상품권이 동이 나던 겨울, 우리는 열심히 책을 읽었다. 한해의 마지막 날이 가고 새해가 밝아오고, 그리고 겨울은 더 깊어져갔다. 깊어진 것은 겨울 뿐이 아니었다.

책을 많이 읽은 마리의 눈은 다량의 생각과 토론으로 더욱 깊어졌으며 사춘기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요섭의 눈은 적당한 반항기와 본인도 모를 방황으로 깊어져갔다.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피터의 눈은 짙은 고뇌로 깊어졌으며 이 모든 것을 봐야 하는 이모의 눈도 역시 깊어졌다. 

세상에 고통받지 않는 영혼이 어디 있을까마는 각자의 삶의 무게가 이렇게 우리들의 눈을 깊게 하고 있었다.

다만 반디의 눈은 그 어느 때 보다 생기로 빛났다. 우리들의 은둔이 반디를 생기 있게 했음은 가장 행복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겨울이 끝날 때쯤 꽤 이름 있는 문예지에 이모의 단편소설이 실렸다. 이모는 자랑스런 아내와 엄마가 되고 싶었으며 나에겐 든든한 이모가 되고 싶어했는데 그것을 이루어 가고 있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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