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매일>

에세이: 우연한 산책

by 오혜원


목적 없이 걷는 날이 좋아졌다. 어떤 산책은 마음에 환기를 불어다 주고. 나를 어디로 데려다 놓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을 일게 한다. 나아간다는 것은. 앞을 바라본다는 것은.



늦은 오후, 병원에 가기 위해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집 밖을 나섰다. 뜻하지 않게 발등에 뜨거운 물이 쏟아져 화상을 입은 터였다.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고를 바르고, 깨끗한 거즈로 상처 부위를 덮고, 한쪽 발에만 슬리퍼를 신어야 하는 일이 꽤 번거로웠지만, 지금의 나는 발등에 흉 지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이어폰을 두 귀에 꽂고 현관문을 나서자, 어제와는 다르게 햇빛이 돌았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지고 우산이 뒤집힐 정도의 바람이 불었으므로 오늘 날씨가 유달리 반갑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거였다. 병원과의 거리는 집과 도보로 10여 분 거리였기에 불편한 발로 절뚝이며 걸어가 보겠다 다짐했지만, 오르막에 있는 집에서 내리막길을 향하는 건 슬리퍼를 신은 발로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가다가 멈추어 붕대의 위치를 원래대로 바꾸어놓아도 발바닥에 힘을 주어 걸을 때마다 서서히 벗겨졌다. 그때 망했다고 생각했다. 이미 1/3 정도는 걸어왔고, 목적지까지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되는 거였는데, 절뚝이는 내 발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조금만 더 무리했다간 붕대 아래에 깔린 거즈마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 할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황급히 택시를 불러 고작 3분 정도를 탑승하고 병원에 도착했다. 화상을 입은 이후 내 인생 최대의 사치란 사치는 다 부리고 있는 거일지도 모른다.



네 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병원은 한적했다. 진료를 보러 온 환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혜원 님! 안으로 걸어가서 오른쪽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적막한 공간에 울리는 티비 소리와 동시에 내 이름을 외치는 간호사의 부름에 달려 나갔다. 진료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간단한 드레싱과 생긴 물집에 대한 관리, 앞으로 흉이 질 수 있다는…… 그런 쏠쏠한 진료였다. 무뚝뚝한 의사 선생님의 말투에 조금 더 사글사글하게 웃어보기도 한다. 불편한 상황이 싫어서 나오는 특유의 웃음이다. 상황이 턱없이 웃길 때도 있지만, 왜인지 그러고 나면 분위기가 풀려있고는 한다. 딱히 그러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다만 그러고 나서 후회했던 적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다음은 약국을 들렀고, 계획에도 없는 빵집에 들러 두 개나 샀다. 크림치즈 빵과 말차 사브레. 집에도 이미 쌓여있는 것인데. 또 필요 없는 구매를 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좋아하는 것에 소비한 것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매일매일이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게 위안을 삼고 빵집을 나서는데 햇빛이 쏟아졌다. 거의 나에게는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정수리 위로. 작은 어깨 위로. 눈앞에 깔린 그림자와 유난한 햇볕이 대조되면서도 잘 어울렸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것도 꼭 그런 걸까. 내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나의 작은 구석을 발견해 준다면 정말 다행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의 빈틈을 하찮게 여길 때도, 누군가는 나의 빈틈마저 빛난다고 말해줄 수도 있다. 삶은 그런 것. 자주 평범하고 아주 가끔 아름다울 테지만, 지난한 순간의 작은 유일을 발견하는 것이겠지.



따사로운 공기가 좋았다. 불편한 외출이었지만 조금 더 시간에 맡겨보기로 한다. 며칠 택시를 타고 다녀서 그랬는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는데도 꼼꼼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우연이 개입되었을 뿐인데 일순간 소중해지는 것들이 늘어난다. 그런 우연이라면 조금은 반갑게 맞이해주고 싶다.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일에 대해 오래 고심하고 싶지 않다. 너무 많은 시간에 걱정과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좁은 인도 위를 걸으며 앙상하게 갈라진 나무를 바라보는데, 귓가에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백예린 님의 산책이라는 노래였다. 그 노래에는 이런 가사들이 등장한다.



좁다란 길 향기를 채우는

가로등 빛 물든 진달래꽃

이 향기를 그와 함께 맡으면 참 좋겠네

보고 싶어라 그리운 그 얼굴

물로 그린 그림처럼 사라지네

보고 싶어라

오늘도 그 사람을 떠올리려

산책을 하네


백예린 - 산책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나는 그 순간 비슷한 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어떤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까. 그건 아마도 혜경이었겠지. 노래와 풍경이라는 건 매일이고 신기한 감정을 안겨다 준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와 현재를 미워하게 될 때, 미래를 바꾸어놓고 싶을 때. 그건 그리움과 후회를 놓아주지 못할 때 가장 먼저 드는 마음 같다. 이제는 조금 시간이 많이 흘러서일까. 어떤 순간에 대한 슬픔보다 그 사람의 평안을 위한 소원을 가장 먼저 빌게 된다. 비록 헐거웠던 삶이라는 시간이 이 우주의 반대편에 있더라도. 그러다 보면 그가 내게 준 사랑이라는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때는 험난했지만, 그게 다 사랑이었구나 하고. 이게 맞는 건지도 모르는 채로 건네었던 사랑을. 그의 평안과 나의 매일이 안온하기를 바라다보면, 순간을 비집고 들어서는 그리움에 시큰거리지 않을 수도 있을까. 다가오지 않은 일들에 미리 휘청이지 않을 수도 있을까.



우연한 산책은 더 낭만적인 것이구나. 발길이 향하는 곳으로 자박자박. 어떤 길이 나오더라도 겁내지 않고 싶어진다. 앞을 향해 마구 걸어간다는 것은 내가 도달할 길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어디로 향하든 상관없다는 뜻일 것이다. 순간에 의미를 던지는 건 나. 어쩌면 살아가는 일도 산책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구겨지던 나의 삶을 매일이고 펴주던 그의 안부가 문득 묻고 싶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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