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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Jun 11. 2022

결혼 십 년 차, 부부가 유학을 왔습니다.

나이를 잊고 사는 법

몰랐었다.

나이를 잊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작년 8월 부다페스트로 유학을 오기 전에는 하루하루 나이를 먹는 게, 한 해 한 해 늙어가는 게 너무나 극명했다. 매년 늘어가던 엄마와 아빠의 나이가 일흔을 넘겨 여든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때, 친구 딸내미가 중학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네이버에서 검색을 하거나 쇼핑을 할 때 자동으로 분류되던 카테고리.


40대 여자가 좋아하는 옷, 지금 40대가 가장 많이 본 뉴스 등등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거기에 AI까지 합세하여, 내 나이를 잊지 않게 해 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나와 남편은 아직 하고 싶은 일이, 해보고 싶은 일이 많은데 늘어가는 나이 때문에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딱 결혼 십 년 차에.

그렇게 우리는 해보고 싶던 일을 꼭 해보고 싶어서 남편과 함께 작년 가을에 유학을 왔다.  유학 오기 일 년 전부터 한국에서 미리 준비를 했던 나는 바로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오기 전 2주 전까지 회사를 나간 남편은 어학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거의 20년 만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이것 만으로도 벅찬데, 유럽의 학사행정은 뭐가 그리 복잡한지 수강 신청에서부터 코로나 때문에 늘어난 온라인 시스템까지 이것 저것 신경 쓸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슨 대학원생이 한 학기에 수업을 8과목이나 듣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다 챙겨보고 난리부르스인지. 수업의 빡심(?)은 교수별로 편차가 매우 큰 편이다. 학생들 발표로만 대강대강 한 학기 때우려는 교수는 유럽에도 있고, '내 수업을 듣는 이번 학기에 일분일초도 딴생각을 하게 두지 않겠어!'식의 학구열에 불타는 교수도 있다.


다시 학생이 되고 난 후, 억지로 나이를 잊으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밀려오는 과제, 발표, 에세이 그리고 또 나름의 교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만나서 놀기도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나이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학기 중에는 거의 매주 발표가 있고, 8과목 수업 모두 매주 과제가 있다. 이러다 보니 한주 한 주 학교 수업만 생각하고 살게 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과제하고, 학교 가고 수업 듣고 집에 오면 밥 먹고 과제하고 자고. 바빠 죽겠는데 나이까지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그러던 중, 최근 잊었던 내 나이가 소환이 된 적이 있다.

헝가리 정부 초정 장학생으로 유학을 와서, 전공과 무관하게 1년 동안 기초 헝가리어 수업을 듣고 시험에 패스를 해야 한다. 이 헝가리어 시험에 떨어지면 그동안 주었던 장학금을 뺏기는 건 물론 앞으로 나올 장학금도 사라진다. 스피킹 시험과 필기시험으로 나뉜 시험에서 나는 스피킹 시험을 먼저 봤다. 두근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시험장 문을 열었다.


작은 강의실에 장학 재단에서 온 심사관 1명과 헝가리어 교수님 1명 이렇게 2명이 앉아있었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나는 그들 앞에 앉았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외워온 것들 잘 말해야지 하는데, 장학 재단에서 심사관이 헝가리어로 상냥하게 묻는다.


"이름과 국적 나이 이야기해주세요."

" 네, 이름은 켈리이고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이는


마.흔.네.살 입니다!."

  

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면접관 2명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헝가리도 예의범절을 엄청나게 따지는 나라여서 웬만해서는 사람 앞에 두고 "What!!! 왓???""" 이런 표정 잘 안 하는데...


그들이 놀란 것만큼이나 나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며 속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지금 내 나이를 말하면서 깜짝 놀랐으니까.... 이 나이에 이게 뭔 짓인지....'  


그렇다.

가끔 이게 뭔 개고생인가 싶다. 낯선 나라에 와서 사니 마음대로 되는 것도 없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은데 이십 대들과 경쟁하려니 힘들고,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서울에서는 아무리 바빠도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남편이랑 소파에 누워 맥주 한 캔 마시면서 넷플릭스 보다가 잠들었는데 여기서는 택도 없는 소리다. 네이버, 넷플릭스 볼 여유도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일일이 챙길 시간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를 잊고 산다.


나이를 잊고 사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나는 이제 더 이상 늘어나는 나이 때문에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공부를 하면서 '나이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지는 않을까'하는 조바심이 사라졌고 자연스레 늙어감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것 같다.


내가 생각을 하던 안 하던,

걱정을 하던 안 하던

나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꾸준히 열심히 일하면서 한 살 한 살 늘어간다.


아마도 중요한 건,

나이 듦을 나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인 것 같다.


늙어가는 나이에 대한 조바심이 사라지니, 자연히 나이를 잊고 살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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