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ra Seed Sep 24. 2021

내 나이마흔셋:부다페스트 유학 생존기

Less is More.



“손님, 수하물 무게가 많이 오버되었어요. 추가 수하물 비용이 많이 나올 것 같은데요….”


“네?? 아, 그래도 일단 얼마나 나오는지 알려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아, 손님 두 분 모두 비즈니스 석 탑승하셔서 총 80KG까지 짐을 부치실 수 있는데요. 많이 오버되었어요. 추가 수하물 비용이 250만 원 정도 나올 것 같아요.”

 

“네???? 250만 원이요?”



2021년 8월 5일 밤 11시 30분경, 인천공항 제1 터미널 카타르 항공 카운터.

동그랗게 놀란 토끼 눈보다는, 뒤통수 제대로 얻어맞은 늙은 장사치의 주름진 눈에서 보이는 세모난 눈이 된 나를 보곤 승무원이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돌려보냈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남편 J도 순간 정지되었다.


 


비행기 탑승까지 앞으로 2시간, 가로세로 최대한 늘어난 저 까만 이민가방을 도대체 어쩐다 말인가? 아, 맞다! 공항에 수하물을 맡아 주는 택배회사가 있다고 했지? 부랴부랴 뛰어가 보니 코로나 때문에 영업을 안 한 단다. 가을 겨울 옷을 최대한 압축해서 담은 저 까만 가방. 버리고 갈 수도 없고 2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순간, 뇌리에 번쩍. 택시! 택시에 태워 일단 서울에 있는 지인에게 보관해달라고 한 후 추후 부다페스트로 보내 달라고 하면 되겠네 하고 J에게 나가서 택시를 찾아보라고 했다. 공항 밖을 빠르게 스캔하고 돌아온 J는 코로나 때문에 택시가 한 대도 없다며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오케이, 접수.  그럼 그다음 해결책은? 눈 간 J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아, 우리가 공항까지 타고 온 콜 밴! 그 기사님에게 빨리 전화해보자. 아직 인천에 계시면 부탁해보자!”

다행히, 그 기사님은 인천 공항을 막 벗어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셨고 기꺼이 우리의 문제적 이민가방을 10만 원에 서울에 있는 시댁에 배송해주기로 했다. 다만, 오늘은 밤이 너무 늦어 내일 아침 일찍 배송을 해주겠다고 하며 까만 가방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다시 체크인 카운터로 가서 남은 짐을 모두 부치자 온몸에 긴장이 풀려 팔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2021년 8월 6일 새벽 1시경 인천공항에서 도하를 거쳐 부다페스트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우리 둘은 스르르 잠에 빠졌다.


 

자축의 의미에서 구입했던 비지니스 좌석. 아~ 비행중 잠자리가 이리 편할 수 있다니...


2021년 현재, 신랑 J와 나의 생물학적 나이, 43살에서 44살 어디쯤.

J는 약 13년간 다닌 대기업을 약 2주 전 그만두었고, 나 역시 지난 수년간 몸담았던 영어교육 사업에서 한발 물러났다. 지극히 안정적이었던 우리의 삶. 결혼하고 10년 동안 이 안정된 삶을 위해 우리는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다. 원룸에서 작은 아파트로, 작은 아파트에서 조금 큰 평수의 아파트로 올라가기 위해서 일주일을 열흘처럼 살았고 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미술사와 예술학을 각각 공부한 나와 J는 2008년경 일본 현대미술전을 공동으로 기획하며 만났고, 결혼과 동시에 나는 미술계를 잠시 떠나기로 했다. 아방가르드, 컨템퍼러리, 컷팅 에지를 키워드로 하는 현대미술계에서 함께 일했지만 비영리공간에서 간헐적 월급을 받고 일하던 나와는 달리 J는 대기업 미술관에서 안정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결혼 후 마주하게 된 현실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경제적 문제가 생활의 불편함을 초래했고, 이를 빨리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자연스레 대기업에 다니는 J보다는 내편에서 일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현대미술계의 실험적이고도 아방가르드한 세상을 떠나,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에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 초보 창업자가 하지 말아야 하는 모든 실수를 아주 꼼. 꼼. 히 저지르며 고군분투를 하다 보니 나만의 노하우가 생겼다. 나의 사업 슬로건은 아주 심플했다. 남들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더 오랜 시간, 더 잘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쥐뿔도 없던 나에게 이것 이외에는 승부수가 없었다. 다행히 수강생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나는 하루에 열 시간의 강의를 마다하지 않으며 사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지난 십 년 동안 나는 강의실 하나에서 시작해, 서너 칸이 있는 건물로 이사를 했고, 마침내 80평 규모의 어학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수년간 힘들게 쌓아 올린 사업이 작년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았다. 집합 금지, 영업 제한, 집합 금지 등이 되풀이되면서 월세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 안내데스크 직원들, 선생님들 모두에게 잠시 휴직을 권고했고, 학원의 월세만이라도 벌자는 생각에 홀로 학원을 지켰다. 정부 방침에 따라 80평이 넘는 어학원을 소독약으로 매일 닦고 간간히 있는 강의와 상담 업무를 처리하고 집에 돌아온 2020년 5월 어느 날 저녁, 나는 문자 그대로 쓰러졌다. 블랙아웃. 소파에서 일어났는데 눈을 뜨니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순간의 기억은 없었다. 처음에는 잠깐 기절했다는 사실에 놀라서 어리둥절했다가 곧 ‘아,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J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는 아니었는데. 더 즐겁고 편안한 삶을 살자고 시작한 일인데 어쩌자고 쓰러질 때까지 몸을 혹사하고 있었을까?


학교 앞 애정하는 카페, Budapest Baristas,에서 라테 한잔 마시며 멍때리는 것 만큼 좋은게 없다.  


사실 사업을 하는 내내 J와 나는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면 해외로 이주해, 나는 애초에 하고자 했던 미술사 박사를 그리고 경력을 바꾸고 싶어 했던 J는 MBA를 공부해 주체적 인생을 살아보고자 했다. 휴가 때마다 어느 나라가 살기 좋은 지 열심히 다녔고, 우리 마음속에는 2018년, 2019년 연속으로 방문한 안전하고,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가 후보지로 올라와 있었다. 구체적 시기는 잡지 못했지만, 부다페스트로의 이주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까, 부다페스트는 현실이 힘들 때 우리가 처방하는 약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차일피일 한해만 더, 한 해만 더 하면서 우리의 꿈을 유예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상 한번 쓰러지고 보니 ‘이러다가 영영 못 가겠구나, 내가 살아보고 싶었던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끝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의 끝에 J와 나는 2020년 준비를 해서 2021년에는 부다페스트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2020년 가을, 학원을 운영해줄 부원장을 채용하며 나는 학원에서 물러났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학 및 이주를 위한 준비를 하며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먼저 좋은 소식은, 헝가리 에는 해외 유학생을 위한 정부 장학금 제도가 매우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Stipendium Hungaricum이라는 장학사업인데, 이를 통해 헝가리 대학/대학원을 지원하여 합격하면 등록금 전액 면제, 생활비, 숙박비, 그리고 의료보험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나쁜 소식은 미술사는 영어로 된 프로그램이 없어서 지원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고민 끝에,  Eötvös Loránd University 인문대의 예술이론 대학 안에 있는 영화이론 석사과정에 지원을 했고 약 10개월에 거친 준비와 시험 또 시험을 거쳐 2021년 6월 장학금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출국을 준비했다. J는 출국 2주 전까지 회사에 나가야 했고, 그의 퇴사와 동시에 우리는 지난 10년간 한국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10년의 결과물] 코로나때문에 해외이사는 해상이 아닌 항공으로만 가능했던 상황. 이사견적을 보니, 가서 다 사는게 낫겠다 싶어 열심히 버리고 또 버렸건만 결국 못 데려온 너.


10년 동안 뭘 그리 많이 샀는지, 버리고 버려도 또 나오는 쓰레기들. 그 쓰레기 중에는 한 때는 우리가 애지중지했던 접시도 있고, 해외여행에서 사 온 예쁘지만 쓸모없는 장식품도 있고, 왜 샀는지 모르는 책과 옷들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온몸에 근육통이 생길 정도로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왔다 갔다 하며 J와 나는 이제 미니멀리스트로 살겠다며 다짐 또 다짐했다. 그렇게 버리고 또 버린 후, 살아남은 아이들은 큰 이민가방 한 개, 대형 여행 가방 두 개, 소형 가방 세 개로 압축되었다. 우리 10년의 삶이 총 여섯 개의 가방에 압축되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참 보 잘 것 없이 느껴졌다. 감상도 잠시, 지긋지긋했던 쓰레기 더미들과 작별한 것이 더 후련해 이제 이 아이들만 데리고 부다페스트로 떠나면 되겠구나 하면서 홀가분했는데……. 출국장에서 또 발목이 잡히다니! 그래도 어찌어찌 짐을 맡기고 보내줄 곳을 찾았으니 다행이긴 한데.  애초에 짐을 쌀 때 더 버렸 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잠시, 세관을 거쳐 비행기 게이트 앞에 앉아 있자, 지난 2주 동안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구입했던 카타르 항공의 비즈니스석은 신의 한 수였다. 식사를 비롯한 기내 서비스는 말로 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으며, 특히 그 붉은 극세사 이불을 폭 덮고 다리를 쭉 뻗은 채 누우니 그간의 걱정은 말끔히 사라지고 오래간만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기내식이 이렇게 맛있을 수 도 있군요. 지난 20년간 기내에서 멀미해서 아무것도 못 먹던 그 사람은 누구였나요...



총 18시간 비행, 인천에서 도하를 거쳐 부다페스트 프란츠 리스트 공항에 드디어 도착했다. 코로나로 인해 공항 경비가 삼엄했지만 외국인의 경우 입국 전 헝가리 경찰청에 예외적으로 입국허가를 받아야만 입국이 허가되는 상황이었기에 다행히 입국장이 붐비지는 않았다. 입국 심사에서 헝가리 경찰청에서 받은 예외적 입국 허가서와 우리가 체류할 곳의 주소를 적은 서류를 건네 주자, 무표정한 세관직원이 꼼꼼히 서류를 확인하고는 도장을 쾅쾅 찍고 헝가리어로 적힌 붉은 스티커를 건네주며 “10 days Quarantine! OK?”를 외쳤다. 오, 예스~ 드디어 입국! 모든 입국 절차를 다 받고 들어오긴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시시각각 바뀌는 법령에 괜히 꼬투리 잡고 입국을 안 시켜주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터라 긴장이 확 풀렸다.


커다란 짐 가방 5개를 찾아 카트에 싣고 룰루랄라 입국장으로 나가는데, 어머나 세상에! 이게 무슨 일……!! 방송국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꽃다발을 든 팬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J와 나는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았고 플래시 세례와 함성을 뒤로한 채 공항 밖으로 나왔다. 자세히 보니, 우리 바로 뒤에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던 헝가리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입국했던 것이다. J와 나는 ‘우리 헝가리 뉴스에 조금 나온 것 아니야?’라고 말하며 어린아이들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 줄 택시를 기다렸다.  


뉘신진 모르겠지만 암튼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제2의 인생을 살겠다며 인천에서 부다페스트로 날아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