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부다페스트 시내에 위치한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미세 먼지 없는 한 여름의 부다페스트는 마치 모든 곳에 초점을 맞춘 사진처럼 선명했다. 예약해둔 숙소 앞에 내리자, 에어비엔비의 호스트로 보이는 민소매 녹색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은 헝가리 여성이 우리를 보고 -정확히는 우리의 가방을 보고- 기겁을 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Hello, Are you Eva?"
"Yes. Yes. Yes. Wait. Wait."
택시에서 짐을 계속 내리는 남편 J를 뒤로하고, 나는 녹색의 여인이 우리의 호스트 에바(Eva)가 맞는지 확인했고 곧이어 금발의 미소년이 등장했다. 그제야 에바의 얼굴에 활짝 웃음이 피었고 우리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부다페스트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코로나 때문에 정말 얼마 만에 손님을 만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그 의문의 주인공, 금발의 미소년은 다름 아닌 에바의 아들이었다. 우리의 짐가방을 보고 놀란 에바는 아들에게 전화를 하여 와서 짐을 나르라고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했던 것이다. 현관을 지나자, 안뜰이 나오고 중문을 열자 드디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어디에 있지? 하는 순간, 선두에 서 있던 에바가 우리를 보며 다짐을 하는 듯한 날숨을 뱉으며 우리 에어비앤비는 4층에 위치해 있으며 오래된 유럽 도시의 빌딩들이 그렇듯이 이 빌딩에도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선언했다. 유럽은 1층을 그라운드(Ground) 층이라고 부르기에, 정확히는 5층이었다.
오, 마이 갓......!
알고 있는 모든 신이란 신은 다 부르며 계단을 올라갔다. 층고가 높은 유럽의 빌딩 덕에 한 층을 올라가는 게 생각보다 더뎠다. 40KG가 넘은 가방을 들고 올라가는 남편 J와 에바 아들의 숨소리는 정말 못 들어줄 정도로 안쓰러웠고, 작은 가방 보따리를 여러 개 들고 올라는 나와 에바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 넷은 짐은 바닥에 팽개쳐둔 채로 거실 소파로 가서 뻗어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깔 웃었다.
힘들게 올라간 것을 잊을 만큼 에바의 집은 쾌적했다.
숨을 돌린 에바는 집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며 혹시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도대체 너희는 왜 자가격리를 열흘이나 하냐며 비행기를 열 시간 넘게 타고 온 이 아름다운 부다페스트를 하루라도 더 즐기지를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혹시 코로나 백신을 안 맞았으면 부다페스트에서 맞고 가라고 친절히 설명했다. 운이 좋게 J와 나는 한국에서 백신을 2차까지 접종을 했지만, 헝가리와 한국이 백신 접종에 대한 상호 간의 인정이 아직 되지 않아 열흘 동안 자가격리가 필수였다. 호스트 에바와 아들은 떠나고, 산 낙지 탕탕이처럼 온몸이 흐물흐물해진 J가 나지막하게 외쳤다.
"배.... 고..... 파....."
"아...... 나도. 나도, 배고파......"
에어비앤비 1층에 위치했던 헝가리 식당. 중앙시장 건너편 Fovam거리에 위치해 있는 맛집.
운이 좋게 건물 1층에 마침 헝가리 식당이 있어 바로 배달이 되었고, 우리 둘은 한 끼도 못 먹은 사람처럼 우 격 우 격 배를 채웠다. 허기가 가시니,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씻고 싶다고 한 것이 마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우리는 양말도 벗지 않고 입고 있던 옷을 입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분명 정오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는데 얼마나 잤는지 눈을 뜨니 밖은 어두웠고, 그제야 씻지 않고서는 더 이상 잘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방에 와보니 J는 아직도 꿈나라다. 예민한 J가 혹시라도 깰까 조심스레 이불속으로 들어가자 눈꺼풀이 또 내려왔다.
어느 정도 잤는지 방안에는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J가 누워있는 나를 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거야?"
"응, 우리 어제 낮에 밥 먹고 1시인가? 그때부터 잤어. 지금 오전 10시야."
"아, 많이 잤네. 하루가 지났구나. 자긴 컨디션 괜찮아?"
"응. 뭐 그냥. 좀 피곤해. 뭐 좀 먹을까?"
"그래. 뭐 먹자. 시켜 먹자"
헝가리에 오기 전 자가 격리 열흘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미 모든 헝가리 배달앱을 다운로드하여온 J가 이것저것 메뉴를 보여주며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보는데 이상하게 속이 메슥거렸다.
"자기야, 나 이상하게 속이 좀 안 좋네....... 메슥거리네..... 두통도 좀 있고...... 아, 또 위가 꼬였나...... 위통도 좀 있는 거 같아. 아, 몸이 좀 따가운듯한 느낌이야......"
"그래? 음...... 그럼 뭐를 먹어야 하나? 속이 그러면 외국 음식은 안 좋은데...."
하면서 J가 상의를 갈아입는데, 등에 온통 빨간 두드러기가 올라온 것이 보였다.
"자기! 등이 왜 그래????!!!!!"
놀란 내가 물었고, J도 거울로 확인을 하더니 깜짝 놀란 눈치다. 아프지 않냐며 재차 물었지만 평소 잔병치례를 안 하는 J는 아프지 않다고만 한다. 걱정이 되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십 년을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알레르기나 피부병 증세를 보인적이 없는 남편인데, 타지에서 그것도 자가격리를 하는 상황에서 몸에 두드러기가 나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순간, 뇌리에 스치는 우리의 과거 행적 하나.
"아, 자기야. 아..... 혹시 이거 우리 오기 전에 대상포진 백신 맞아서 그런 거 아니야?"
"아.......!ㅜ.ㅜ"
낮은 탄식과 함께 우리 둘은 실소를 했고, 미쳤다며 우리가 미쳤다며 하필 그걸 왜 이렇게 바쁘고 피곤할 때 맞고 온 건지 한탄했다. 모든 백신은 건강할 때 그리고 쉴 수 있을 때 맞아야 하는데, 해외이주를 앞두고 비행기 타기 하루 전에 맞았으니...... 우리의 건강을 너무 맹신한 탓이었다. 맞을 때는 컨디션이 좋았으니까. 어쨌든 J의 두드러기도, 나의 몸살 기운도 대상포진을 살짝 앓는 것이구나 하는 자체 진단을 내렸다. 한국에서 챙겨 온 알레르기 약과 타이레놀을 먹고 일단 좀 자고 일어나서 뭘 시켜먹기로 했다. 약기운에 둘 다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왜 일까? 아프면 정말 끙끙 앓는 소리가 난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J도 나 만큼 몸이 안 좋은지 계속 자기만 했다. 또 얼마나 잤을까? 아무래도 약을 더 먹어야겠는데, 빈속에 먹기에는 속이 너무 쓰렸다. 자고 있는 J를 깨웠다.
"자기야, 이제 좀 일어나 봐. 좀 괜찮아?"
"아, 아....... 응. 나는 괜찮아. 잘 잤어? 자긴 좀 어때?"
"그나저나 지금 몇 시야?"
"어....... 오 마이 갓. 헐. 미쳤나 봐. 지금 일요일 저녁 6시야. 우리 미쳤어.
30시간을 잔 거야......!"
아, 30시간이라니. 이렇게 또 인생 수면 시간을 경신하나? 둘 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30시간을 잤을까 멍청히 생각하는데 J가 뭘 먹을지 빨리 결정하라고 했다.
"아, 아픈데 뭘 고민해. 그냥 한식 먹자. 한식당에 죽은 없겠지?"
한식당에서 배달한 김치찌개, 조미김, 알타리 김치 그리고 밥.
당연히 죽은 없었다. 이럴 땐 전복죽을 먹어야 하는데. 크고 싱싱한 전복살을 송송 썰어 내장과 함께 참기름에 살살 볶아서 만든 전복죽 한 그릇 먹으면 아픈 거 싹 없어질 것 같은데. 아~서럽다. 서러워. 아픈데 죽도 못 얻어먹고, 이게 타향살이의 서러움인가? 갑자기 서울에서 어르신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헝가리 가서 한국음식 먹고 싶어서 어떻게 사냐고 몇몇 어르신들이 걱정을 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한식 꼭 안 먹어도 잘 살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도착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한식이 이리 그립다니! 벌 받는 건가? 후회가 밀려왔고, 라면 네 봉지 달랑 들고 온 우리가 참 철딱서니 없게 느껴졌다. 결국 우린 김치찌개, 알타리 김치 그리고 김을 시켜서 국물만 간신히 떠먹었다. 그리고 또 계속 잤다. 그렇게 우린 자가 격리 열흘 동안 무지하게 아팠다. 열흘 동안 자가 격리 안 했어도 못 나갈 컨디션이었기에 딱히 자가격리의 답답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자가 격리가 끝날 무렵 몸은 정상으로 회복되고 있었고, J의 등에 올라왔던 붉은 수포도 거의 다 사라졌다.
자가 격리 기간동안 무한 증식하는 배달 봉지들...^^;;
5층까지 저 무거운 생수를 들오고신 배달 기사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컨디션도 회복했고, 자가격리도 끝났다! 학교 개강까지 보름 정도 남았으니 이제 나가서 맛집도 가고, 부다 성이나 어부의 요새 같은 유적지도 가보고 바치 거리에서 쇼핑도 하고 좀 즐길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레었던 건 앞으로 최소 5년 동안 살 부다페스트에 우리 집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렌트이지만, 한국과는 다른 유럽식 앤틱함이 묻어있는 예쁜 집에서 살 생각에 오기도 전부터 설레었던 참이다. 자, 그럼 이제 헝가리로 이주하면서 항상 꿈꿔왔던 나의 로망! 고풍스러움이 묻어나는 높은 천장이 있는 예쁜 집을 찾으러 함께 가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