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집이야!
셀레는 마음에 부다페스트 오기 전에 새로 산 나이키 에어를 장착하고, 8월 중순 한 여름의 부다페스트에 맞게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시원하고 가벼운 옷을 입고 부동산 투어에 나섰다. 폭신폭신한 새 신을 신자, 마치 이 신발이 우리를 아름다운 집으로 이끌어 줄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2018년 봄, 2019년 가을,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몇몇 부동산 중개소와 미팅을 통해 부다페스트의 집들이 어떤지 그리고 가격은 어떻게 되는지 사전 조사를 했었다. 부다페스트로 이주를 결심하기 전에, 우리가 정말 이곳에서 살 수 있을지 꼼꼼히 확인하는 차원에서였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틈만 나면 이 부동산 사이트들을 들락거리며 어떤 집이 매물로 나왔는지 확인했던 참이어서 집을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찾는 집의 조건은, 나의 학교와 J의 학교가 위치한 5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최소 방 2개에 모든 가구, 가전이 완비된 1000유로 미만의 깨끗한 플랫이었다.
참고로 헝가리에는 한국의 네이버 부동산과 같이 인가틀란(https://ingatlan.com/)이란 부동산 사이트가 있고, 헝가리의 모든 부동산 중개인들이 자신의 매물을 올리는 곳이다. 대부분의 헝가리인들이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외국인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T부동산과 E 부동산을 통해 매물을 찾았다. 이 두 곳의 중개인들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고 또 집주인과 영어로 소통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해 영어를 잘하는 헝가리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에어비엔비를 나와 조금 걷자 T부동산 중개인 레헬(Lehel)과 만나기로 한 아스토리아(Astoria) 역에 도착했다.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8월 중순의 부다페스트의 햇살로 이미 내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J의 얼굴에는 땀 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역 한쪽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한 헝가리 남성이 보여 다가가 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을 한 레헬은 문자로 연락했을 때와는 달리 영어가 매우 서툴렀다. 아마 헝가리어 영어 구글 번역기가 꽤 좋은 수준인가 보다. 그래도 아주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를 따라 부동산 투어에 나섰다. 첫 번째 집은 사진에 봤던 것보다 많이 어두웠고, 두 번째 집은 공동현관에서 안뜰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 쓰레기 수거장을 놓아 음식물 쓰레기 악취가 진동을 했다. 헝가리는 한국처럼 엄격하게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관리인이 꼼꼼하게 분리 수거장을 감시, 관리하지 않으면 무엇을 상상하던 상상 이상의 더러움을 보게 된다.
드디어 세 번째 집 도착. 와우! 이 집은 뭐지? 이 계단의 급경사는 최소 십 년 이상 산을 탄 사람만이 가능한 경사였다. 게다가 전등도 다 나가 어둡기까지 해서 집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 집은 아웃이었다. 계단의 경사만큼이나 급격하게 내 얼굴도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사실 집 내부 자체는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보다 실제로 보면 더 나은 경우가 많아 집주인이 진짜 렌트를 줄 생각이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한국의 경우 사진을 먼저 보고, 실물을 대할 때 내가 같은 것을 본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인데, 아직 포토샵을 대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곳 헝가리에서는 사진의 비진 실성이란 것은 없다. 그러니까, 헝가리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플랫의 사진들은 정말 가서 보면 똑같거나 심지어는 더 좋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생각 못했던 것은, 건물로 들어가는 공동현관에서 안뜰로 가는 길, 그리고 중문과 계단 등 유럽의 전통적인 ㅁ자 구조의 건물에서 봐야 하는 전반적인 건물의 상태였다. 대부분 집 내부 사진만 올려놓아서 이 부분은 직접 가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연속 세 번 아웃, 흑... 쓰리 아웃을 당하고, 날씨도 덥고 조금만 걸어도 지쳤다. 푹신했던 운동화의 촉감은 사라지고 땀에 전 운동화가 발의 숨통을 죄는 것 같았다.
J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투덜거리면서 걷다 보니, 고급 상점가가 즐비한 안드라시 거리가 나왔고 왠지 조금은 상쾌해졌다. 네 번째 집 앞에, 한 헝가리 남성이 귀여운 보더콜리 한 마리와 서 있었다. 중개인 레헬이 한 걸음에 달려가 반갑게 헝가리어로 인사를 한다. 한 여름 부다페스트의 더위와 삼진아웃의 충격으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우리는 한발 늦게 인사를 했다.
뭐지? 저 눈빛과 저 말투는? 정말 무성의하게 '헬로'라고 던지고는 중개인 레헬과 둘이 헝가리어로 막 떠든다. 살짝 기분이 나빴으나, 뭐 둘이 할 얘기가 있나 보다 생각하고 관심을 껐다. 대화를 마치고, 집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성큼 다가와 대뜸 물어본다.
(나는 영국에서 온 여자 두 명이 우리 집 보러 온다고 들었는데. 영국 사람이야?)
(뭐? 아니. 우리 한국에서 왔고 보다시피 결혼한 부부야.")
(응. 이상하네. 레헬이 너희 영국에서 온 여자애 2명이라고 했거든. 그런데 우리 집 월세가 얼마인지는 알아?)
(뭐? 무슨 소리야? 월세 부동산 사이트에 있잖아. 그거랑 달라?")
안 그래도 더워서 얼굴이 빨개졌는데, 이 집주인의 태도에 열이 받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소싯적 미국에서 살아 영어가 편한 나와는 달리 J는 영어가 편치 않아, 부다페스트에 온 이후로 대부분의 소통은 내가 책임지고 있었다. 화가 난 내가 J에게 말했다.
음, 뉘앙스가,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는데. 이미 내 기분은 나빠졌고, J한테까지 내 기분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아 참았다. 집도 보나 마나 마음에 안 들겠거니 생각하고 혼자 기분을 삵히며 네 번째 플랫 쪽으로 걸어갔다. 내 기분도 모르고, 집주인의 애견 보더콜리 한 마리가 앞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너무나 사랑스럽게 어서 들어오라고 몸짓을 한다.
'뭐지? 건물 입구 멀쩡한데? 쓰레기통도 없고, 어라, 중간 현관 깨끗하고 관리 잘 되어있네. 그럼 분명 계단이 이상할 거야. 앗, 계단도 정상이네.....'
집안으로 들어가자, 사진에서 보았던 벽난로가 붉은 벽과 조화를 이루어 포근한 인상을 주었다. 월풀이 딸린 욕실, 널찍한 개수대 2개, 별도의 화장실 그리고 안뜰로 크게 창이 난 크고 깨끗한 방 2개, 잘 짜인 옷방과 고급 주방 가전이 완비된 이 집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기분 나빴던 것도 잠시, 꿈꿔왔던 것과 같은 집이 눈앞에 나타나니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그 사이, 우리를 꼼꼼히 살펴보던 주인의 태도도 바뀌어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집을 홍보하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부다페스트에 온 이유와 서울에서의 직업을 물어보며 한층 적극적으로 집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현재 세입자가 8월 31일에 이사를 나갈 예정이어서 9월 1일에 입주가 가능하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지만 이미 알고 있던 터라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플랫을 나와 집주인과 기분 좋게 악수를 하고 오늘, 내일 몇 군데 더 둘러볼 곳이 있어 계약을 하게 되면 이번 주 안으로 연락을 주겠노라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속으론 '그래, 이 집이야! 더 볼 것도 없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p.s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어떤 유명한 분이 말했었죠? 명언은 명언대로의 삶을 살고, 제 삶은 그냥 제 말대로 제 생각대로 되면 참 좋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