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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Oct 28. 2021

엄마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

"엄마, 배드민턴이나 한판 칠까?"

"그럽시다."


배드민턴 공이 아파트 주차장을 휙 휙 왔다 갔다 하는데, 왜 엄마는 안 움직이고 나만 이리저리 뛰지? 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소리쳤다.


"아, 엄마! 좀 살살 쳐."

"오홍홍홍, 네가 아무리 뛰어봤자 엄마 손아귀지."  

 

정말 얄밉게 대답을 하고 엄마는 나에게 강 스파이크를 내리쳤다. 헉헉 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은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근데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엄마 고등학교 때 배드민턴 선수였다며?"


"오홍홍홍, 응. 엄마 배드민턴부 소속이었지."


"뭐야. 그럼 진짜 너무하잖아. 엄마, 그럼 배드민턴 대회도 나갔어?"


"오홍홍홍, 아니. 엄마는 만년 후보였지. 힘들게 선수를 왜 하니? 후보 자리에 앉으면 얼마나 잘 보이는데. 오홍홍홍"




수 십 년 전,  연애도 안 하고 학교도 가기 싫었던 날이면 엄마와 자주 배드민턴을 치곤 했다. 매번 엄마에게 당하면서도 조금만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주 도전장을 내밀곤 했다.






학창 시절 엄마는 나와 동생들에게 한 번도 공부하라고 종용을 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명문대를 가라고 압력을 넣은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학원에서 아이가 안 왔다고 전화가 오면, '애가 피곤해서 자요. 그래서 오늘은 못 보내겠어요'라고 할 정도였다. 그저 건강하게 졸업만 하면 된다는 것이 엄마의 생각이었다. 장손에게 시집을 와서 일 년에 여덟 번이나 되는 큰제사를 할 때도 엄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깐 밤을 놓아야 하는 제사상에 과감하게도 생 고구마를 밤 모양으로 깎아 놓았고, 아빠에게 하도 들어서 어린 나도 아는 홍동백서를 계속 헷갈리고, 생선찜을 놓아야 하는 자리에 산적을 놓고, 전을 부칠 때는 모양보다는 양이 중요했다.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항상 이번 제사상엔 피자와 같은 신세대 음식을 올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곤 했다.


부다페스트로 유학 오기 전, 시골에 사는 엄마를 만나러 자주 갔다. 엄마는 사십 년 정도 된 고물 피아노 앞에 앉아 뚱땅 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시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말에, 나는 칠순이 넘은 엄마가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에 너무나 신이 났다. 이 고물 피아노는 버리고 전자 피아노를 사 줄 테니 그걸로 연습도 하고, 레슨 선생님도 불러드린다고 했다. 엄마는 그 고유의 '오홍홍홍홍' 웃음을 터뜨리면서, '됐어~ 무슨 전자피아노야. 엄마는 이걸로 됐어. 대회 나갈 것도 아니고 이걸로 연습하다가 나중에 코로나 풀리면 피아노 학원 다닐 거야.'라고 했다. 속상했다. 기왕 피아노를 연습할 거면 좋은 피아노로 좋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면 더 좋을 텐데 엄마는 왜 싫다고만 하는지.



엄마는 당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해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소위 자식들을 모두 명문대에 보내는 최고의 엄마가 되고자 하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유교적 전통을 받드는 최고의 며느리가 되고자 하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기만 하면 오케이였다. 그러니까 엄마는 이 미션을 '패스'만 하면 되지 굳이 '에이 플러스'를 받고자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중요한 건 우리들의 건강, 그리고 아빠와의 데이트, 아빠와의 여행, 그리고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닮지 않았다. 여섯 살 때쯤 조금 철이 들고 나서부터, 나에게 엄마는 안하무인 고모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었지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 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혹은 옆모습을 보고 자랐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나에게 아빠는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가족 모두의 삶을 짊어진 아빠의 어깨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에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었고, 사업상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빠는 나와 동생들에게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공부를 못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지 않으면 사회에서 낙오된다는 것을.  



그렇게 나와 동생들은 항상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삶에 익숙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밤에는 공부를 해서 더 좋은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날들이 없었다. 처음 미술계에 발을 딛었을 때 나는 완벽한 비주류였다. 예중, 예고, 그리고 특정 미대로 이어지는 한국 미술계의 서클 안에서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타자였다. 그곳에서 주류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는 무던히도 노력을 했다. 그들보다 나은 나의 장점이 무엇인지, 내가 미술계에서 비교우위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더 잘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생각했다. 전시 서문을 잘 쓰기 위해 많은 철학책을 읽었고, 전시 기금을 따기 위해 불물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으며, 해외 큐레이터, 아티스트들과의 네트워크 형성 위해 그들과의 소설 라이징(socializing)에 무던히도 애썼다. 그렇게 비주류 출신인 내가 주류에서 인정받을 쯔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을 떠났다. 막상 주류가 되고 나니,  어쩌면 더 이상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그간의 노력이 너무나도 소모적이었다는 생각이었다. 주류로 편입되기 위해 애썼던 지날 날들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미련 없이 떠났다.  




그렇게 미술계를 떠나 어학원을 운영하면서도 나는 항상 그렇듯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 마흔 살이 훌쩍 넘어 여기 부다페스트로 유학을 오면서 다짐 또 다짐했다. 이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지 말고 내 삶을 즐기면서 살아야지. 그런데 참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여기와 서도 그 병이 스멀스멀 도지는 것 같다.


마흔이 돼서 학교를 다니면 정말 다를 줄 알았다. 한국에서 석사 학위를 안 받았던 것도 아니고, 대학에서 강의한 경력이 근 7~8년이니 여기서 조금은 '플렉스' 하면서 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이다. 당연히 나는 여기서 다른 대학원생들과 똑같은 학생이다. 그들과 경쟁하기도 하고 교수에게 서로 인정받기 위해서, 더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대학원생들 중 하나 일뿐이다. 그래서 자꾸 최선을 다해 잘하려고 한다. 그리고 헝가리의 대학원 과정은 생각보다 인텐시브 하다. 한국식으로 교수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개념은 거의 없고, 대부분 세미나 위주의 수업이다. 학생 스스로 해당 수업에 관련된 자료를 읽고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토론하는 형식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 참고문헌을 더 읽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렇게 인텐시브 하게 공부하던 중, 드디어 이번 주 월요일부터 일주일간의 가을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을 방학 동안 과목별로 예습, 복습할 목록을 정리하고 거기에 논문 연구까지 어느 정도 해놓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벌써 목요일이라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목표했던 것만큼 공부도 많이 못했는데 방학을 너무 낭비한 것은 아닌가 자책하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인스타그램을 보는데, 세상에나 학교 동기들은 벨기에, 체코, 독일 등지에서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 세상에. 내가 병이 또 도졌구나. 플렉스는커녕 여기서 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려고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엄마에게 고백하고 싶어 진다.



"엄마, 지금 와서 보니 엄마가 맞네

제사상을 최선을 다해 차려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남의 조상 제사상에 그만큼 했으면 됐지. 또 자식들 모두 명문대 보내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 시집 장가가서 다 지 살림 사느냐 바쁜데. 그리고 또 피아노 치는 것도 엄마만 듣기 좋으면 됐지. 꼭 좋은 피아노로 칠 필요도 없지.

엄마, 나도 이제 좀 그렇게 살려고. 사십 넘어서 유학 와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는 게 중요하지 뭐 최선을 다해 잘해봤자 뭐하겠어. 에이 플러스받아서 뭐해, 패스만 하면 되지, 그렇지? "   


지금도 엄마는 전화할 때마다 이야기한다.

'공부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놀아. 거기 유럽 엄청 좋잖아. 정서방이랑 놀러 다녀. 좋은 거 많이 보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홍홍홍 그리고 엄마랑 아빠 놀러 가면 좋은 곳 많이 데리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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